춤 - 꽃향시향

“조그만 액자에 화병을 그리고 해바라기를 담아놨구나/ 검붉은 탁자의 은은한 빛은 언제까지나 남아있겠지/ 그린 님은 떠났어도 너는 아직 피어있구나/ 네 앞에서 땀 흘리던 그 사람을 알고 있겠지”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이 흥얼거리던, 까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흥얼거리던 노래이지요. 눈치채셨나요? 산울림의 노래이지요.
게오르그의 25시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 그 배경이 되었던 루마니아의 크라이오바. 실제로 그곳에서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평선까지 이어진 노오란 해바라기 밭. 그것은 장관이었지요.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들불이었지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 평야를 덮은 그 해바라기들을 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 그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거대한 불덩이임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모르겠다구요? 그럼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속 노랗게 불이 붙은 해바라기가 어느새 검붉은 불길을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요. 해바라기는 불입니다. 타오름입니다. 고흐는 해바라기에서 불을 보았던 게 틀림없습니다.

나는 묻는다
미치지 않고서는
좀더 타오를 수 없었을까.
미치지 않고서는
타오르는 해바라기 속의 소용돌이치는
심령을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것일까

살아있는 동안
나는 온몸으로
소용돌이치는 글씨를 써야 한다.
<나는 타오른다>고 -
그리고 색채에 취하여
영원히 언덕과 보리밭을 달려가야만 한다.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 위하여
영원히 영원히
찬란한 간질성의 질주로 -
- 김승희, 「나는 타오른다」 전문

생각하면 생명작용이란 일종의 타오름입니다.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은 탄다는 것. 이 순간에도 내 몸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산화작용. 고치의 어둠을 뚫고 나온 나방은 어디로 가는가. 이카루스는 또 어디로 가려했는가. 불이지요. 태양이지요. 그야말로 미치도록 타오르는 생들이지요. 해바라기는 우리에게 타오르라고 불처럼 타오르라고 해마다 여름이면 불같은 꽃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으른 사람의 불은 언제나 나무의 정수(精粹)를 전부 태우지는 않는다. 연기는 빛나는 불꽃을 마지못해 떠난다. 불꽃은 아직 태워야 할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태워야 할 많은 것이 있는 것이다!
-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에서

해바라기. 가끔은 해바라기를 보면서 이제 해버리기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 수천 년 바라기만 했으니 이제는 해를 버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해바라기가 아니라 해버리기가 되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나저나 해바라기 하면 떠오르게 되는 시가 있는지요? 수많은 시들을 떠올리겠지만 저는 해바라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32살의 나이로 요절한 함형수(1914~1946)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입니다. 『시인부락』1)1집의 권두시로 실린 작품이지요.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새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청년 화가 L을 위하여」 전문

일찍이 수많은 시인들이 고흐의 그림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많은 시를 썼으니, 이 시 또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고흐가 아니라 화가 L이지요. 그렇다면 L은 누굴까요. 바로 이인성(1912∼1950) 화가입니다. 일제강점기 ‘천재화가’ 혹은 ‘조선의 고갱’이라 불렸던 바로 그 이인성 화가입니다. 저는 함형수가 이인성의 해바라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해바라기 하면 윤동주의 동시도 떠오릅니다.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 들어
집으로 온다
-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전문

사실 일제강점기 때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읽을수록 슬퍼지는, 동시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슬픈, 그런 작품이지요. 해바라기를 통해 누이를 연상하는 시가 또 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작품인데요, 1977년 9월 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광림 시인의 「해바라기」입니다.

호숫가 마을에는
두릅나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주민들은
뿌리를 짓이겨
관절에 붙이고 절름거렸다

소용돌이는
위험수위를 간신히 빼돌렸지만
막국수를 먹고 난
경춘선 열차가
늑장을 부리다 움찔하자
세상이 기우뚱하였다

-안녕
손을 젓던 누님은
이가 빠지기 시작한
해바라기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 김광림, 「해바라기」 전문

경춘선을 타고 고향을 떠나는데 누이가 저 멀리 해바라기처럼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데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서울로 상경하던 70년대의 풍경이 그려지는 작품이지요.
지난 주말에는 춘천의 권진규미술관을 갔는데, 뒷 공원에 해바라기가 활짝 피었더군요. 생전의 권진규 작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 해바라기였다고 합니다. 해바라기 다 지기 전에 춘천의 권진규미술관을 한번 다녀가시는 좋겠습니다. 끝으로 졸시 「해바라기」를 띄웁니다.

당신이 바깥으로 떠돈 시간만큼
길게 늘인 목으로
누룩뱀처럼
제 몸을 감고
눈과 귀와 입을 감고
마침내 바라기마저 감아버린

여자

당신이 오래 전부터 그려온
마침내 당신의 부재가 완성한

자폐의 꽃
- 졸시, 「해바라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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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부락(詩人部落)』은 1936년, 당시 혜화전문학교 학생이던 미당 서정주가 만든 잡지로 1집(11월)과 2집(12월)을 내고 종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