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공연평

*제주도립무용단 배상복 안무의 『춤, 홍랑』
제주의 숨결과 맥박 속에서 창작의 블루오션 발견한 수작(秀作). 제주도립무용단 안무자 배상복이 로컬리즘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약 200여 년 전 제주여인의 참사랑을 다룬 『춤, 홍랑』이 지난 5월 21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랐다. 『춤, 홍랑』은 정조시대 제주로 유배 온 조정철과 제주여인 홍윤애와의 사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수작이다.
제주 여인의 참사랑을 다룬 『춤, 홍랑』은 첫 장면부터 독창적 전개로 주목을 끌었다. 우선 입체적 공연미학이 돋보였다. 무대 중앙 밧줄에 매달린 홍랑의 비극적 죽음 장면이 시선을 압도했다. 무대 후면에 쌓은 단도 장면마다 입체감있게 활용되었다. 홍윤애의 사랑과 절개를 중심 축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토속적인 춤의 향연이 90여분 동안 다채롭게 펼쳐졌다.
윤미영(홍윤애 역), 강광옥(조정철 역)은 시종 밀착된 교감 속에 성숙한 내면연기로 서사의 비극성을 인상 깊게 그려냈다. 혼신을 다한 사랑으로 지켜내고자 한 홍윤애의 애절함이 인상깊게 전달되었다. 강인한 기상과 더없는 온유함으로 조선조 선비의 상(像)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악역인 김시구로 분한 강진형은 폭력적 이미지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선사했다. 절도있는 춤사위로 역동성을 강조한 남성군무를 비롯 제주를 표상하는 토속춤과 우리 춤의 다양한 레퍼토리가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져 묘미를 더했다.
최근 융복합의 트렌드를 적극 활용한 기법도 예사롭지 않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제주의 사계가 영상으로 표현되고 이에 조응하는 정갈하고 단아한 춤사위는 시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춤, 홍랑』의 성공요인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선 안무자의 치열한 작가정신, 그리고 혼연일체된 무용수들의 열정이 큰 몫을 했다. 배상복식 춤매소드로 조련된 제주도립무용단 무용수들의 춤기량은 지역색을 벗어나 이제 수준급에 도달해 있다. 치밀하게 계산된 등퇴장, 완급이 조율된 무대구성, 장면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춤사위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안무자는 무용극의 전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대적 세련미로 예술적 성취를 구현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제주 고유의 아이덴티티에서 소재를 발굴해 무용극화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제주의 숨결과 맥박 속에서 창작의 블루오션을 발견한 안무자의 통찰력이 놀랍다. 『춤, 홍랑』은 제주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서사무용극으로 손색이 없다. 춤으로서 제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 이른바 ‘예술의 힘’을 과시한 의미있는 본보기였다.

*부산시립무용단 김용철 안무의 『업경대』(7월14~15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를 상징한다. 근대 시기엔 일본을 통해 ‘이상한 배’를 타고 건너온 ‘양(洋)’의 무대로서, 신문화(新文化)로 표상되는 ‘서구적 충격’을 이 땅에 전파시키는 데 중요한 관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근대 신무용(新舞踊) 삼인방으로 불린 최승희, 조택원, 배구자 등은 서울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뱃고동 소리를 앞세우며 일본 시모노세키 항구로 향했다. 그리고는 제국의 수도 도쿄로 진입했다. 유럽으로 향할 때 역시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 또는 요코하마에서 인도양을 건너 유럽의 관문 바르셀로나로 이동했다. 이렇듯 항구도시 부산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관문으로 통한다. 부산은 ‘서양춤의 한국적 수용’ 과정에서 비껴갈 수 없는 중요한 요충지이자 ‘춤 실크로드’로서 공간적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항구도시라는 특성에 걸맞게 부산사람들 역시 대체로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산 무용계는 늘 활기에 차 있다. 무용가들 또한 남다른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으로 무장돼 있다. 부산시립무용단이 1973년에 창단되었음은 예사롭지 않다. 국립무용단은 발레와 한국무용이 ‘동거’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1973년 국립극장의 남산시대가 개막되면서 비로소 한국무용 전문단체로 분화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부산시립무용단이 국립무용단 창단시기와 같은 1973년에 창단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43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시립무용단이 이른바 ‘김용철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제74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업경대』(2016년 7월 14~15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는 부산시립무용단의 변신을 표상하는 의미심장한 용트림이었다. 김용철 안무의 『업경대』는 2010년 초연된 이래 수 차례 리바이벌되면서 예술적 완성도를 꾸준히 높여왔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 무대에서 호평받은 작품이기에 예술성과 작품성은 이미 검증된 바다.
불교의 49재에 담지된 삶과 죽음의 생사관을 다룬 『업경대』는 김용철의 출세작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된 부산시립무용단에 의해 공연된 이번 『업경대』는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진다. 전통춤 또는 신무용적 몸놀림에 익숙한 부산시립무용단의 무용수들이 길지 않은 시간동안 현대적 몸짓의 창작춤사위를 소화해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2개월 남짓한 연습기간 동안 안무자의 매소드를 이해하고 몸으로 체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 발현된 부산시립무용단의 프로다운 자세와 근성, 노련하고 원숙한 무대매너는 칭찬받을만 하다.
초반부 거문고 라이브 연주와 티베트의 전통음악은 고요함과 여백의 가치를 일깨운다. 신비로움이 묻어나는 이국적 감성의 음악은 무용수들의 다채로운 몸짓과 어우러져 아시아적 감성을 극대화했다. 온몸에 흰색을 칠한 무용수의 부토적 몸짓과 다소 기형적이면서도 기묘한 표현도 인상적이다. 밀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종교적 신비성은 엄숙한 제의성으로 승화되면서 작품의 내적 깊이를 더했다. 정적이 흐르는 고요함 속에 일렬로 앉은 무용수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습지를 구겨 접으면서 토해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음향으로 손색이 없다. 무대 천장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흰 눈꽃과 더불어 『업경대』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힌다.
김용철은 이번 작업을 통해 자신의 안무력과 함께 새로운 감각의 연출력을 통해 중견 안무자로서의 존재감을 보다 뚜렷이 했다. 그는 무대공간의 대형화로 인한 극장 메커니즘의 변화를 능숙하게 커버했다. 60여 명의 무용수들이 펼치는 다채로운 역할도 스펙타클한 구성을 가능케 한 요인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무대는 때론 고요하게, 때론 혼돈 속에 휩싸여 있었다. 관객들로 하여금 집단 최면으로 빠져들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객석을 휩쓸고 지나가는 대형 천의 형상은 퍼포먼스적 성격이 짙다. 관객과 적극 교감하고자 한 재치있는 발상으로 읽힌다.
『업경대』는 전통춤 동작과 창작춤사위, 현대춤적인 움직임이 공존한 무대였다. 한마디로 ‘경계’를 뛰어넘은 자유분방함이 넘쳐 흘렀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이질적 느낌의 움직임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정교하게 계산된 등퇴장, 독무와 2인무, 군무 등 다채로운 구성도 밀도있게 전개되었다. 힘찬 역동성과 원시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남성군무는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춤언어로서 독창적 문법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김용철 안무의 진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업경대』에서 구현된 스펙타클성은 단순히 볼거리 차원을 넘어 독특한 공연미학으로 승화되었다.
이번 공연은 적지 않은 세월, 세계를 누빈 아시아의 아티스트 김용철이 ‘노마드’한 삶을 청산하고 한곳에 안착해 보여준 결기의 무대였다. 안무자의 치열한 작가정신, 프로단체 무용수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난 『업경대』는 한국창작춤의 공연미학적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유의미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자체의 공공무용단체는 해당지역 무용계의 심볼로 통한다. 그러나 아마추어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김용철은 『업경대』 공연에 부산을 비롯 영남권 대학의 무용과 남자 재학생들을 대거 선발하여 객원무용수로 참여시켰다. 순수와 열정으로 무장된 아마추어리즘, 능숙함과 노련미가 내장된 프로페셔널리즘이 성공적으로 융합되어 의미있는 궤적을 남겼다. 상호 자극하면서 긍정적 에너지를 유발해 성공적인 공연으로 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김용철의 전략적 선택은 적중했다. 이번 작업에서 지역사회 무용커뮤니티와 적극 교감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높이 사고 싶다. 안무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감독, 나아가 행정가로서도 남다른 안목과 감각이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이른바 ‘김용철 시대’를 맞이한 부산시립무용단의 예술적 행보가 향후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면서도 기대된다. 앞으로 보다 왕성한 활동을 통해 침체기에 놓여있는 부산 무용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