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키의 서울유레카
‘와규(和牛)’는 이미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고급 소고기를 가리킨다. 그중 ‘고베 비프’는 연한 육질과 꽃무늬 마블이 살아있어 일본의 3대 와규 중 하나로 불린다. 살코기 중심인 서양의 소고기와는 식감에 큰 차이가 있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일본이 이렇듯 세계적 소고기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육질개량을 위한 여러 노력들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이라면 육식문화 또한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일본이 육식을 본격적으로 장려한 시기는 명치시대 이후로, 서민들도 즐기기 시작한 지는 100년도 안 되었다.
육식 금지 이전의 시기
원시시대의 일본열도는 수렵채집 사회를 기반으로 한 부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고대 유적지에서 사슴·원숭이·토끼·곰·물개 등 60가지 이상의 포유동물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대부분이 굽거나 삶아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일본도 농경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사냥보다 가축을 키우는 방향으로 변했다. 키우던 가축은 대륙에서 건너 온 돼지와 닭이 주를 이뤘으며, 그 뼈들이 주거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3세기의 중국 쪽 기록을 살펴보면 소와 말 등은 아직 사육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가족의 상을 치르는 열흘 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본 고대사회 육식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도 있다. 또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육식 금지의 원인
「일본서기」 기록으로 보면 ‘서기 552년에 백제에서 일왕에게 불상을 선물로 보내오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근래의 연구로는 538년에 전래되었다는 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불교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제를 비롯한 서국(西國)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 같은 이유로 일본도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육식금지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힌다.
675년 불교를 신앙하던 텐무왕(天武王)은 덫과 날리는 도구로 수렵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농번기인 4월부터 9월 사이의 육식도 금지했다. 대상이 된 가축은 소, 말, 개, 원숭이, 닭이었으나 사냥으로 잡은 사슴과 멧돼지는 제외.
나라시대 이후 더더욱 육식 금지를 강화시킨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으나, 가축을 먹던 백제를 비롯한 외부세력의 관리나 귀족계급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때쯤부터 귀족계급과 서민들 사이에 식문화가 확실히 분리되었다. 귀족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사냥한 고기를 중심으로 즐겨먹었다. 유럽에서는 귀족들이 고기를 먹고 서민들이 못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반대이며, 종교 때문에 식문화에 차이를 보인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무사의 시대
1192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열리면서 무사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열렸다. 무사들은 수렵으로 잡은 멧돼지, 사슴, 곰, 너구리 등을 먹었으며 육식에 대한 금기가 희박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은 여전히 고기를 먹지 않으며 무사들을 경멸했으나 남몰래 고기를 먹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한편 육식을 금기시하는 불교도를 위해 사찰을 중심으로 쇼진요리(精進料理, 채소요리)가 발달되기도 했다. 서민들은 육식을 하였으나 불교적 가치관의 보급으로 도축업자(부라쿠민)들은 차별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치시대가 될 때까지 서민보다 천한 계층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백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듯.
전국시대에 접어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양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들의 문물과 함께 음식문화도 같이 들어왔다. 고추나 감자 등 남미 대륙이 원산지인 채소도 이때 들어왔다. 그 당시 서양인들은 ‘일본에는 가축의 고기 대신 개고기를 먹는다.’는 등 문화다양성을 배제하거나, 다소 우월한 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아무튼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기를 미식 차원에서 즐겼다기보다는 보양식으로 먹었다. 육식은 종교적으로 죄스러운 일이지만 약으로서의 효과가 기대되는 식재료였던 것이다.
일본도 전에는 개고기를 먹었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개를 안 먹게 된 시기는 17세기 후반이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겠다. 당시 일본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소고기는 즐겨 먹었는데 부활절 때 일본인 신도들에게 밥에 소고기를 넣은 음식을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되면서 무사들은 유교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유교는 육식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상류층을 중심으로 이 금기를 계속 지켰다. 짐승 고기를 먹는 일은 청렴을 미덕으로 여기는 무사들에겐 터부였으며, 이 금기를 지키는 것은 정결한 신체를 유지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육식 금지가 최고조로 달한 것은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의 집권기인 겐록시대 때다. 그는 1687년 살생을 금지하는 법 ‘쇼유라 아와레미노 래이(生類憐れみの令)’를 발표했다. 전국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도쿠가와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과 짐승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의식들은 여전했으며, 에도 안에서 살인사건이 빈번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쿠가와는 이른바 ‘동물 사랑법령’을 발표하면서 모든 살생을 금지했으며, 짐승이나 가축의 고기뿐만 아니라 생선도 금식시켰다. 즉, 서민에게까지 채식을 강요한 것이다.
1646년생인 츠나요시는 개를 특히 아껴 등록제를 실시해 학대를 단속했다. 1690년에는 ‘개 학대 밀고자’에게 상금을 걸 정도로 철저히 단속했다. 츠나요시의 사후인 1709년에는 이 악법은 폐지가 되었지만 개고기를 먹는 일은 표면상 그 후 사라졌다. 도쿠가와는 일명 개쇼군(犬將軍)으로도 불린다.
에도시대하면 조선통신사를 빼 놓을 수 없다. 육식을 즐기던 조선인들을 에도막부는 어떻게 대접했을까? 에도막부는 외교적인 배려로 에도를 오가는 길에서 멧돼지 고기 등으로 대접했고, 에도성의 만찬에서는 어패류, 조류(鳥類)를 제외한 수육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도성의 만찬은 의식적인 음식이기에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 음식이 준비되어 제공되었다고 한다. 한편 부산의 왜관에서 조선식 음식이 제공됐고, 소고기 등의 수육도 사용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일은 육식이 왜 안 되었는지에 관한 연구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진행됐다는 점이다. 유학자인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은 그의 사후인 1709년에 간행된 「슈기가이쇼(集義外書)」에서 “소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는 신을 더럽힌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농경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며, 사슴이 안 되는 이유는 사슴 고기를 허락해주면 소에도 영향이 생길 것이다.”라고 했다. 후지이 란사이(藤井瀨齊)는 1715년에 간행한 「와칸타이헤이코우키(和漢太平廣紀)」에서 “공자에게 제사하는 행사인 석전(釋奠)에서 고기를 올리는 일은 바르지 않다.”며 유학자의 입장에서 육식을 비판하기도 했다.
육식, 금기에서 장려로
명치시대에 이르러 소고기를 먹는 일이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일본식 소고기 전골인 스키야키(すき燒き)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소고기를 먹는 것을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를 지향한다는 뜻)’라고 개화사상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식을 요리를 만들기에는 식재료와 지식이 부족했다. 때문에 전골이나 된장구이 등 일본식 소고기 음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육식은 정신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믿는 사고방식도 여전했다. 정부 차원에서 ‘육식을 더러운 행위라고 여기는 사고는 오히려 개화를 방해하는 일’이라고 발표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육식이 대중화되지 못한 근본 원인은 피를 뽑는 기술이 미흡해 요리에서 나는 역한 냄새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민들도 육식을 기피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72년 2월 18일에 육식을 반대하는 신사의 신관들 10명이 궁궐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명이 사살됐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5명이 체포됐다. 난입한 동기는 “외국인이 온 이후 일본인이 육식으로 인해 정신이 더럽혀졌다. 신이 있을 자리가 없어졌기에 외국인을 추방하기 위해 결기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일왕이 공식적으로 육식을 한 기록은 1872년. 일왕 스스로 고기 먹는 기록을 남겼고, 국민들에게 육식을 장려했다. 육식을 장려한 가장 큰 기관은 군대였다. 당시 군대에 가면 흰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하여 입대하는 남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단이 오히려 영양 불균형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각기병 환자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이를 막기 위해 군대는 육식을 장려하며 메뉴도 서양음식 중심으로 바꿨다. 청일전쟁 당시 육군에서는 고기와 생선을 하루에 150g 이상을 섭취하라는 지침서를 만들기도 했다. 1910년에 육군에서 발간한 「군대요리법」에는 고기를 메인으로 한 서양음식으로 돈가스, 비프가스, 비프스테이크, 롤양배추, 카레라이스, 훈제돈육, 비프스튜, 비프샌드위치 등 오늘날 우리가 흔히 먹는 요리들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쌀밥 대신에 빵이나 보리밥이 제공됐으며, 각기병 환자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한다.
결국 군인들이 고기 맛을 알게 됐고,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육식을 즐기면서 서민들에게도 차차 육식 습관이 전해졌다. 그러면서 소고기의 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부족하게 되자 대용품으로 돼지고기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1883년 일본인의 고기 소비량은 연간 4g이었지만 1926년에는 500g 이상으로 육식이 보편화됐다. 물론 고기를 사용한 음식이 발달된 것도 이유지만 통조림의 발달이 육식을 가속화시켰다는 설도 있다. 군대에서 고기를 조리한 통조림 수요가 크게 는 것이 원인이라는 설이다.
고기에 대한 수요는 크게 늘었으나 그래도 일본인들이 즐겨먹는 단백질은 생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생선도 물가통제령(1946년 발령) 대상품목에 포함됐지만 1949년에는 공급이 수요를 상회하면서 대상품목부터 제외됐다. 1946~7년경부터는 고기의 대용품으로 스팸 같은 미군의 통조림이 시장에 유입되어 대용식으로 어느 정도의 수요가 있었다고 한다.
1946년 말부터 일부 학교에서 급식을 다시 시작했으며, 1952년부터는 고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급식에서 서양요리가 식단에 포함되면서 밥 대신 빵을 주는 곳도 늘어났다. 이것은 미국산 구호물자였던 밀가루를 소비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도 밥보다는 빵이 나오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빵이 맛이 없어서 안 먹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아무튼 학교 급식을 통해 아이들의 입맛을 서양식으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1975년에는 일본인의 고기 소비량이 생선 소비를 넘어섰다. 또한 단순히 소비가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도축된 가축의 산지와 상태에 따라 등급을 매겨 서두에 언급한 ‘와규’라는 이름으로 브랜드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 하나는 한국에서 판매되는 와규는 일본산이 아닌 호주산이다. 일본의 어느 축산농가에서 불법으로 와규의 정자를 호주의 축산농가에 팔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제는 ‘와규’라는 말은 호주산 소고기를 부르는 대명사가 됐다. 이에 관해선 다른 기회가 있으면 소개하겠다.
일본은 육질을 적극적으로 개량하면서 고기 소비량이 비약적으로 급증했다. ‘초밥’을 ‘스시’라고 부르는 것처럼 와규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한 일본축산농가의 일탈로 또 일본 축산농가의 세계 진출도 늦었고 ‘와규’는 이제 호주 것이 돼버렸다.
어쨌든 일본에서 육식이 본격화된 지 100년, 한때 일본인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했던 반육식문화도 최고급 육식 ‘와규’를 만들어낼 정도로 극적으로 변했다. 일본의 식문화, 다음 100년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