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이번 호부터는 기획자로서 30년 가까이 직접 무대에 올렸거나 기획 또는 제작을 했던 공연들 중에서 마음속에 의미 있게 남아 있는 것들을 몇 개 골라 그 기억들을 더듬어 볼까 한다. 「춤」지의 성격에 맞게 무용 공연만을 다루기로 하는데, 그중에는 ‘볼쇼이 발레 첫 내한 공연’ 같은 세계 최상급의 공연도 있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국내 무용가들을 위한 뜻 깊은 무대나 민간 무용단과의 공동제작도 있다.
1993년 11월16일 오후 7시30분. 서소문 호암아트홀에서는 「전통명무 7인 무대」라는 공연이 열렸다. 이날 공연의 콘셉트는 당시 중견이던 남성무용가들로만 구성된다는 것이었다. 명창 안숙선 선생이 출연했지만 단독 공연이 아니라 춤에 구음을 넣는 역할이었으니 오롯이 남성들만을 위한 춤무대였던 것이다.

출연자와 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이흥구(1940~ , 국립국악원 상임안무가, 이하 당시 소속)의 김천흥류 『춘앵전』, 정재만(1948~2014, 서울예술단 무용감독)의 한영숙류 『허튼살풀이』(안숙선의 구음 협연), 김진홍(1935~ ,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의 이동안류 『동래한량춤』, 국수호(1948~ , 중앙대 무용과 교수)의 송범류 『태평산조』, 임이조(1950~2013, 남도도립예술단 지도교수)의 이매방류 『살풀이춤』, 조흥동(1941~ , 국립무용단 단장)의 강선영류 『태평무』 그리고 채상묵(1945~ , 채상묵무용단 단장)의 이매방류 『승무』였다. 모두 무형문화재 보유자 전단계인 보유자 후보 또는 전수조교들로 그 이전 세대인 김천흥, 이동안, 이매방, 김진걸, 송범, 강선영, 한영숙, 김숙자 등의 맥을 잇는 전통춤의 3세대로서 당대의 정상에서 한창 활약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1세대인 최승희, 한성준, 조택원 등의 맥을 이어 온 2세대가 고령이거나 고인이 되어 사실상 그들의 시대가 저물어 가던 시점에 다음 세대들을 한자리에서 주목해보는 의미 있는 무대였던 것이다.

당시 중앙일보에서 공연기획자로 입문한 지 4년차가 되던 필자는 전통무용 분야에선 이런 기획이 스스로의 머리에서 나올리 만무한, 아직 때를 다 벗지 못한 초보였다. 1989년 발레 공연으로 처음 기획자의 길로 들어섰던 필자는 당시 무용담당 기자들 특히 객석의 장광렬 기자와 경향신문의 유인화(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사무국장) 기자를 가끔 찾아가서 보도 자료를 떠안기기도 하고 무용계의 이야기를 귀동냥하기도 하던 때였다.
아마도 그해 봄이나 초여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날 장 기자가 내게 “한국 전통춤의 정상에 서 있는 중견 남성 무용가 중심으로 무대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아마도 내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은 다른 신문사와 달리 중앙일보는 호암아트홀을 운영하고 있었고, 국내 예술가들의 무대도 이곳에서 심심찮게 만들고 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정상급 남성 중심의 무대라는 아이디어가 참신하다는 생각을 하고 회사에 돌아와 선배, 동료들과 상의를 했다. 그리고는 바로 추진을 해보기로 하되, 대상자 선정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므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더 듣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술하거나 편파적으로 보이게 했다가는 오히려 욕만 듣고 기획을 아니함만 못한 결과를 빚을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장 기자와 유 기자뿐만 아니라 일간스포츠 문화부장이던 구히서 선생에게도 몇 번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위와 같은 7인의 남성무용가들을 한 무대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중간에 두어 건의 에피소드도 있었다. 추천된 인물 중에는 당시 나체춤을 추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무용가가 있었는데 다른 출연자들 다수가 그의 출연에 대하여 흔쾌히 동의를 하지 않아 부득이 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 무용가의 행위가 무용가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소동은 출연자 중 채상묵, 국수호, 임이조 선생이 승무를 서로 추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스승인 이매방 선생 외에는 누구도 나서서 중재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득이 필자가 이매방 선생을 찾아뵙고 조정을 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선생이 그 특유의 욕을 섞어가며 그들에게 몇 마디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그들이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들어 조정을 끝내는 것이었다. 결국 서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승무를 채상묵 선생이 추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왜 그렇게 결정을 했는지는 문외한인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아마도 나이로 (채상묵 선생이 최 연장자니까) 결정을 했겠거니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 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올 초에 모 국립단체 예술감독을 뵌 자리에서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추억 삼아 했더니 “아마도 당시 치열한 경쟁심을 누그러뜨리려 했을 수도 있다”라는 그럴 법한 해석을 내놨다. 이미 선생은 고인이 된 후이니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 1천 석짜리 호암아트홀 좌석은 며칠 안 가서 매진이 되었고, 부산, 광주 등지에서도 티켓을 문의하는 전화가 잇따랐다. 이들 남성 무용가들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 몰랐다. 공연 당일 무작정 극장 로비에 미리 와서 먼 곳에서 일부러 왔으니 입석이라도 입장을 시켜달라고 떼를 쓰는 이들도 꽤 되었다. 사실 허가를 받은 극장은 지정된 좌석 외에 입석을 팔수는 없다. 소방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관객을 통로에 앉게 했다가 비상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그대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무작정 상경을 감행한 그들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내부 회의 끝에 결국 그들을 보조 의자 등을 깔아 입장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당일 매표율이 108%가 되었다. 그러니까 80명이 더 입장을 한 셈이었다. 매표율 108%는 아마도 한국 공연사에서 흔치 않은 사례일 것이다. 다행이 아무런 사고 없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극장을 나오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관객들도 여럿 있었다. 공연 당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경쟁심 같은 기운이 출연자들의 눈빛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출연자는 분장실에서 소주 두병을 마시고 무대에 올라갔다. 습관이라고 본인은 말했지만 그만큼 모두에게 긴장되는 무대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사반세기가 흘렀다. 이매방(1927~2015) 선생과 임이조(1950~2013), 정재만(1948~2014) 선생은 그 사이에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었다. 한 시대를 장식하고 간 그분들의 명복과 남아있는 분들의 무병장수를 다시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