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여름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브라질 아니 세계인의 축제인가요, 리우 올림픽도 끝이 났다. 올림픽 하면 여러분은 어떤 꽃을 떠올리나요? 올림픽과 꽃이라니 무슨 소린가 싶겠지요. 올림픽 하면 장미가 떠오른다고 하면 뭔 생뚱맞은 소린가 하는 분들도 있을 테지요. 그런데 ‘올림픽과 장미’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단어를 완벽하게 버무린 시가 있지요. 문인수 시인의 「장미란과 무쇠 씨」라는 시입니다.

장미란은 그만 바벨을 놓치고 말았다.
잠시 망연하게 서 있었으나 곧
꿇어앉아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오른손을 입술에 대
그 키스를 청춘의 반려, ‘무쇠 씨’에게 주었다. 그러자 마침내
오랜 무게가 한 잎 미소로 피어났다. 손 흔들며 그렇게
그녀는 런던 올림픽 역도 경기장을 떠났다.

장미란 모두 활짝 마지막 시기를 들어 올리는 것,
마지막 시기가 참 가장 붉고 아름답다.
- 문인수, 「장미란과 무쇠 씨」 전문

4년 전 런던 올림픽, 역도 선수 장미란의 은퇴 경기를 기억하실런지요. 마지막 바벨을 실패한 장미란 선수는 무릎을 꿇고 바벨에 키스를 했지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마침내 손을 흔들며 장미란 선수는 그렇게 올림픽 무대에서, 아니 역도라는 무대에서 퇴장을 했더랬지요. 노시인도 그때 그 장면을 보았던 것일 텐데요. 노시인의 눈이 얼마나 밝은지요!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한 시적 이미지로, 시로 만들다니요!
‘장미란 모두 활짝 마지막 시기를 들어 올리는 것,
마지막 시기가 참 가장 붉고 아름답다.’

그래요. 절정이지요. 절정의 꽃. 꽃의 절정. 가장 뜨거운 날 가장 뜨겁게 피었다가 뜨겁게 지고마는 꽃. 마지막 시기가 참 가장 붉고 아름다운 꽃. 장미입니다.
장미 하면 뭐니뭐니 해도 제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시인은 아무래도 릴케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니어라’
이 아름다운 시는 사실 릴케의 묘비명이지요. 평생 장미와 여인을 사랑했던, 그 힘으로 시를 썼던, 그 중에서도 14살 연상의 루 살로메를 죽도록 사랑했던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는 그의 시구에는 살로메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지요. 릴케는 죽음마저도 장미와 여인으로 완성됩니다. 이집트에서 온 어느 여인에게 장미꽃을 꺾어주다가 장미의 가시에 찔렸지요. 그 상처가 패혈병이 되어 그만 숨을 거두지요. 죽음마저 한 편의 시가 되어버린 릴케. 장미 하면 릴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일찍이 릴케가 간파했더라

아, 밤에 피는 장미 ♬
나의 사랑 ♬
오, 순수한 모순이여
장미 같은 사랑 ♬

모순을 뚫고 장미는 피더라
- 졸시, 「TV 드라마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을 ‘장미가 꽃을 피우는 방식’으로 바라보면 우리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전문

여름에는 무순한 꽃들이 피어납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도 꽃은 피지만 그래도 꽃 피는 계절은, 꽃이 절정을 이루는 계절은 여름이지요. 그리고 그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장미이지요. 그런데 겨울에 피는 장미를 본 적이 있는지요? 사실 겨울에도 간간히 장미가 피기도 합니다. 철 모르는 장미가, 철이 없는 장미가, 때 아닌 겨울에 피어나기도 합니다. 아니라구요. 그러면 이은하의 노래, 「겨울장미」를 한 번 들어보시지요.

‘철이 없어 그땐 몰랐어요/ 그 눈길이 무얼 말하는지/ 바람 불면 그대 잊지 못해/ 조용히 창문을 열면서/ 나는 생각해요/ 겨울에 피는 흰 장미여/ 아직도 나를 기다리나/ 감춰진 마음 보고 싶어/ 햇살을 향해 피었는가/ 사랑의 말 내게 들려줘요/ 그리움이 나를 반기도록…’
(이은하, 「겨울장미」)

겨울에 핀, 철이 없어 때 아닌 겨울에 꽃을 피워올린 장미는, 그러나 여름장미와 달리 초라하기 그지없지요. 가냘픈 꽃잎 몇 장으로 겨우 장미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흡사 여름장미가 지는 모습보다 더 초라하지요. 그래도 피어야만 하는 그 절절함. 그래도 꽃을 피워내야 하는 그 간절함. 그래서 겨울장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더 마음을 아리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겨울장미처럼 마음을 아리게 하는 시가 있습니다. 최금진의 시, 「장미의 내부」입니다.

벌레 먹은 꽃잎 몇 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놓는다
겹겹의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노을은 덜컹거리고
방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같이 살자 살다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남자의 텅 빈 눈 속에서
뚝뚝,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 최금진, 「장미의 내부」 전문

사랑도 위대한 사랑도 고단한 삶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의 장미는 어쩌면 신기루일 뿐, 겨울장미가 오히려 더 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 장미의 모순이 무척이나 서럽습니다.

하루에 몇 번 무릎 세우겠구나, 머언 기적 소리에. 네가 띄운 사연, 行間의 장미 웃고 있다만. 그리던 방학에도 내려오지 못하는 燕아. 너는 일하는 베짱이 화가 지망의 겨울 베짱이. 오 이건 쫌쫌 네가 가을볕에 짜준 쥐색帽. ─室內帽로 감싸는 아빠의 치통. 오 이건 닿을 데 없는 애틋한 아빠의 자정의 독백. 燕아, 네가 띄운 사연, 行間의 장미 웃고 있다만.
- 박용래, 「행간의 장미」 전문

박용래 시인의 「행간의 장미」도 장미를 노래한 무수한 시편들 중에서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연(燕)이는 박용래 시인의 따님이지요. 그 딸이 보내온 편지, 그 행간에 장미가 피었답니다. 방학이면 한 번 내려오겠지 싶었는데 내려오지 못한 딸에 대한 아빠의 그리움이 행간의 장미로 핀 것이지요.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 오규원, 「개봉동과 장미」 부분

사실 장미는 무척 흔한 꽃입니다. 덩굴식물인 장미는 그냥 가지를 꺾어서 마당에 꽂기만 해도 뿌리가 내리고 어느새 덩굴을 이루고 꽃을 피웁니다. 그 모양과 색깔이 아름다워서 흔하게 집 마당이며 집 주변에 심어져 있는 장미. 그런데 그 흔하다는 이유로 어쩌면 더 우리의 시선 바깥으로 밀려나기도 하는 법이지요. 무심코 지나친 골목골목 장미꽃들이 활짝 피었을지도 모릅니다.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더 늦기 전에 당신이 무심코 지나친 장미들은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