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김성용댄스컴퍼니무이 『린치』(8월26~27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1 되새김질 예술가의 작품을 발표이후에, 특히 공연예술에서 이미 허공에 흩어져 버린 것의 잔재를 모아 되새김질 하는 것은 왜일까. 그 잔재 역시 사건현장의 핏자국도 아니고 단지 대뇌피질에 가까스로 붙어있는 희미한 잔상일 뿐인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잔소리하며 지적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예술가가 되지 못한 콤플렉스 때문에? 업계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모든 것의 합이겠지. 하지만 언어는 발달하고 육체적 표현은 모호해지고 거꾸로 언어를 통해 몸을 다시 분석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 ‘춤’은 움직임 자체로 승화되지 못하고 언어라는 필터링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장르로 변모해서, 언어와 개념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개입의 여지를 열어놓았고 여기에서 되새김질은 기동한다. 트림과 함께.

#2 바보 기본적으로, 춤은 직감과 감정의 표출이어야 한다. 트레이닝을 하고 테크닉을 배우는 것은 자신의 언어 이전의 감정을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외부의 언어적 개념을 변환해서 육체적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언어로 보다 명징하고 세련되게 할 수 있는 일을 힘겹게 몸으로 번역 할 필요는 없다. 바보인가?

#3 린·치· ‘선입견’ 공연 관람 며칠 전 제목이 린·치·, 라고 말로 전해 들었다. 린·치·, 뭐죠? 주먹 날리는 린치? 린치하면 메릴 린치도 있고 데이비드 린치도 있다. BBC는 21세기 100대 영화 1위로 린치의 영화를 꼽았다. 뭐든 그것이 이 작품의 소재인가 주제인가. 잠깐 이런 저런 생각 중에 아무 사전정보 없던 나는 수많은 정보를 생산하면서 ‘선입견’을 갖게 됐다. 게다가 혹시 어린 남성댄서들이 우르르 뛰어다니는 게 아닐까 설마하는 걱정도 하고. 공연 당일 로비에서 처음으로 포스터를 봤다. 뒤돌아보는 여자. 붉은색 필기체로 인쇄된 『Lynch』. 어헛, 저게 린·치·였나. 리플릿을 열어볼까 하다 참는다. 난 가장 안 좋은 선입견이 팸플릿에 나오는 해설이라는 사실을 안다.

#4 『린치』 공연이 시작된다. 두 명의 여성 댄서. 조명은 사선으로 떨어진다. 그림자가 보기 좋다. 공연 내내 몇 장면 빼면 조명은 계속 사선으로 떨어지고 그림자를 주목하게 될 때가 많았는데, 이건 연출의도인가? 4명의 댄서가 춤추는 듯, 한 시야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좋은 장면. 두 댄서는 수준급이다. 잘 훈련되고 자기 근육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댄서. 이 정도 댄서가 나오면 신뢰감이 생긴다. 이제 마음 놓고 지켜볼 수 있다. 두 댄서는 무대전체를 활용하며 여러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첫째, 속도와 엇벅자. 천천히 움직일 때 한 동작의 연결되는 다음 동작이 전 동작의 힘이 소멸되지 않은 시점에서 치고 나오는데, 그게 묘한 엇박자를 보이면서 댄서의 테크닉과 힘과 근육의 컨트롤에 공감하는 즐거움을 주는 점. 둘째, 움직임의 방향. 방향성에서 댄서들의 춤이 기괴하게 보이게 되는데 이런 것이다. 사람은 뒤로 가려면 돌아서서 앞으로 가고, 누워있다면 일어서서 가고, 구부리고 있다면 펴서 가는 것이 정상. 즉, 사람은 서서 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걸어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 질서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너무도 확고한 것이라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은 혼란, 역겨움, 기괴함을 불러일으켜서 각종 호러물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데, 두 댄서는 무대 맨 앞에서 맨 뒤까지 누워 관절꺽기로 이동하는가 하면, 허리가 굽어진 상태에서 손으로 땅을 짚고 절지동물처럼 무대를 어슬렁거려서 모두의 불쾌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두 댄서는 너무 닮아 있어서 구분이 잘 안 될 정도였는데, 팔꿈치를 들 때 각도차이가 유일한 듯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한 쪽 댄서의 머리색깔이 더 밝았다(길이는 비슷했다).
나는 55분 공연동안 댄서들의 움직임과 조명, 효과음 속에서 아름다움, 댄서와의 공감, 즐거움, 기괴함, 고통, 불쾌감까지 체험했으니 한 상 잘 먹은 셈인데, 돌아서는 나를 잡아끄는 건 제목과 팸플릿이다. 하긴 왜 ‘린치’인지 난 이해 못했다. 누구누구에게 린치 한다는 것인가. 전술했듯이 누가누구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또 굳이 이야기를 만들자면 두 댄서는 한 여자의 분열된 두 자아가 아닐까. 네모 난 무대는 그 여자의 마음 일 테지. 굳이 ‘린치’를 끌어다 이해한다면 두 댄서가 서로 린치 하는 게 아니라 무대 위 두 댄서에게 쏟아지는 빛과 소음들이 린치겠지.
이제 숙제처럼 팸플릿을 열어본다. 안무는 김성용, 무용수 박은영, 마리코 카키자키. 아하, 밝은 헤어 칼라가 마리코 씨였군. 작품설명을 봐야지. 아래에 작품설명을 옮겨본다.
“안무가 김성용은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폭력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약한 개인이 대항하기 어려운 구조적 폭력과 그 반복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 (중략) … 이번 작품에서는 폭력에 노출되어 고통 받는 개인과 집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외면하는 다수의 잔인한 침묵, 불편한 시선, 압박 속에서 괴로워하는 ‘나’와 ‘너’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 무용수 두 명을 등장시켜 풀어낸다.”(『린치』 팸플릿)
아, 이런 어렵고 복잡한 것을, 재기 넘치는 사람이면 365일 동안 풀어낼 수 있을 주제를 달랑 댄서 두 명이 55분 동안 표현하고 관객은 이해해야 하는가. 선행학습이 필요한가. 아무런 정보 없이 감상한 관객은 이 팸플릿을 읽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팸플릿에 경도된 관객은 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어느 쪽이든 자신이 자발적으로 느낀 감정은 숨어버리고 억지로 이해로 짜 맞추기를 할 텐데, 이건 린치 아닌가. 제발 관객의 상상력에 제동을 걸지 말라. 춤 공연장에 와서 자유를 잃어서야 말이 되는가.

#5 작품탄생의 순방향 작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고통과 욕망을 감지하고 다이렉트로 작품을 표현해야 한다. 그 고통과 욕망은 순수한 것이어서 언어로 분석?정리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모든 것들이 녹아있고 표현되어서 관객 또한 어떤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춤 작품이 언어적으로 정리되고 문법적으로 설명가능하다면 춤출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6 언어의 주술에서 헤어나라 굳이 난 이렇게 춤을 보고 싶지 않다. 나에겐 춤이란 무용수의 살아 움직이는 근육이고, 그 것을 폭발시키는 힘이며, 그것을 제어하는 통제력이다. 움직임 속에 생명력과 희열이 그대로 존재한다. 그것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할까. 『린치』의 안무가와 무용수는 대단했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들이 분명하다. 그러니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언어를 통해 작품을 재구성 하지 말라. 그것이 추세인가. 그러나 솔직해지고 자신을 가져라. 내 춤은 ‘내 불안과 고통의 몸부림’이라고 얘기하라. 아닌가? 이제 춤은 언어의 주술에서 헤어나야 한다. 만일 아니라면 무대 위의 춤들은 박제화될 것이다. 이제 진짜 춤은 이태원 클럽이나 GD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