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관무기

■ 고블린파티 공동창작 『은장도』(8월19~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는 작았다. 서민 아파트 방 하나 크기다. 객석에서 내려다보는 초미니 극장이다. 무대와 객석 사이엔 완충지대가 없다. 무대 끝이 객석 맨 앞 열이다. 무대가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 세 번째 줄 가운데쯤에 앉았지만 역시 민망하다. 초보 관객에게 밀착된 무대는 느닷없고 당황스럽다. 팔짱 끼고 앉아 익명의 방만함을 즐기기는 글렀다. 관객이 들어차면서부터 긴장감이 밀려왔다. 무식함과 생소함을 무표정으로 숨기고 있을 생각을 하니 어색하고 불편했다. 무용수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긴장하라는 예령처럼 불이 꺼졌다. 객석의 숨소리만 환하다. 기척도 없던 스피커가 예의 없이 울린다. 부드럽고 옅은 빛이 조심스럽게 무용수들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20대로 보이는 네 명의 여성 무용수는 부동자세로 도열해 있다. 소리는 무례한데 빛과 사람은 공손하다. 무용수의 행색은 너무도 평범했다. 무엇보다 눈두덩을 팬더처럼 만드는 분장을 하지 않았다. 화장기 뺀 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의상도 펑퍼짐한 바지에 무채색의 셔츠, 블라우스가 다다. 라면 사러 나온 원룸 자취생차림새다. 삼선 슬리퍼를 신으면 딱이지만 모두 맨발이다. 한 사람 빼고는 키도 고만고만하다. 나도 모르게 무대 쪽으로 살짝 다가앉았다.
무용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채로 날갯짓하는 듯하다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들어 객석을 노려 본다. 주먹감자를 날릴 기세다. 그러다 바닥에 모로 눕는다. 두 무릎을 가슴께로 모으는 것 같더니 손바닥으로 연신 바닥을 친다. 요가 하듯 두 손 두 발로 거꾸로 버틴 채 허리를 말굽 모양으로 접는다. 몸짓에선 끊임없이 암호와 주문(呪文)이 난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도대체 해독불가다. 표정은 수시로 바뀐다. 눈썹으로 미간에 여덟 팔자 그린다. 입을 벌리거나 앙다물기도 한다. 그게 몸짓과 짝을 이루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밑천도 하나 없는 주제에 알려고 하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자.’ 주눅이 조금은 풀렸다. 네 명의 무용수가 허공에 알 수 없는 도형을 무수히 그려낸다. 몸짓과 함께 쏘아낸 눈빛이 객석 곳곳에 동시다발로 탄착점을 형성한다. 덤덤하던 마음에 물방울 같은 게 떴다가 가라앉는다. 느낌이 그랬다. 무용수 둘이 어우러지다 한 사람을 바닥에 내 팽개칠 땐 마음속으로 빗줄기가 사선을 그었다. 그러다 물 기운이 페퍼민트 향처럼 신선하게 피부에 번지기도 했다. 왜 그런지 모른다. 말이 아니므로 … 다행히도 아직 무용수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운 좋으면 끝까지 피할 수 있겠다 싶었다.
무용수들의 동작이 눈에 익숙해질 무렵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죽어도 말 안 할 것 같았던 그녀들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꾸미거나 다듬은 무대용 언사가 아니다. 공사판, 뒷골목, 선술집에서 들을 법한 소리다. 거친 말과 육두문자가 벽이며 천장에 표창처럼 날아가 꽂힌다. 그녀들이 겨냥한 과녁은 가진 것 없는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위선적인 세상이었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라고 서슬이 시퍼래서 치받을 땐 괜히 움찔했다. 말이 몸짓의 각을 세워주는 듯했다.
그녀들은 한 술 더 떠 말에 리듬을 얹어 랩까지 읊었다. 꽤 잘한다. 유머러스하지만 역시 날이 바짝 서 있다. ‘잠깐이겠지’ 싶었는데 랩을 꽤 오래 이어간다. 무용수끼리 운율을 맞추기도 하고 한 명이 앞서고 나머진 뒤따르기도 한다. 춤사위와 랩이 긴박해지면서 마음엔 눈이 쏟아진다. 사방이 희뿌옇다. 휘몰아치는 눈송이는 숨가쁜 장단에 맞춰 바닥에 푹푹 떨어졌다. 쌓일 때 신음을 냈다. ‘절제의 미? 개나 줘버려!’ 하는 듯 직선으로 내지르고 내뱉는다. 몸짓과 말로 할 수 있는 건 다한다. 무대가 가까워서 좋았다.
몸짓이 잦아들고 그녀들이 주재했던 마음속 비와 눈도 그쳐 갔다. 절망의 춤사위, 고통의 몸부림, 절규의 비틀림, 두려움의 움츠림, 분노의 치떨림 같은 것으로 뛰던 심장도 적막감에 동조해 갔다. 공연이 끝났구나 싶었을 때였다. 무용수가 갇힌 정육면체의 틈새로 피가 배어 나와 뚝뚝 떨어졌다. 몸뚱이를 감싼 가죽부대가 혼의 절규를 견디다 못해 파열하며 피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핏빛은 초록이다. 그래 피는 원래 초록이지 싶었다. 수모와 고통으로 푸른 멍이 든 체액이기에, 험한 세상 살아낸 생명의 수액이기에… 피는 질리도록 창백한 바닥을 살아있는 뱀처럼 흘러 내렸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날 때 저렇게 쉼 없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무대와의 낯가림이 가실 무렵 공연은 초록빛 선혈을 스태프스크롤로 흘려 보내며 끝났다. 땀범벅이 된 무용수들은 발그레한 얼굴로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박수와 환호성이 샤워 줄기처럼 쏟아졌다. 초록빛 피를 지닌 관객들이 총총히 극장을 빠져나갔다. 네 명의 무용수를 무대 밖에서 보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무대와 현실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그들을 새로 만나 흥분 가신 미소를 1+1처럼 받아가기가 꺼려졌다. 무대 끝 인사 때의 표정과 그 감정을 선명하고 푸르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사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