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살롱

갈까 말까 끌탕하다가, 한순간 냉큼 갔더란다! 추석 고향에 갔더란다. 밤새 그늘만 밟으며 도둑처럼 갔더란다. 마을 어귀 늙은 팽나무 여전하고, 산허리 하얀 메밀꽃 우우우 아기 젖니처럼 돋는구나.
저 놈의 달덩이는 어쩌자고 그리 밝은지.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안고 놀자! 도대체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놓았을까’(송찬호시인). 도대체 누가 밤하늘에 만삭의 달떡은 심어놓았나.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도대체 누가 그 하얀 볼에 살짝 검댕은 묻혀놓았나. 어느 시러배 자식이 ‘저 달장아찌는 박아 놓았나’ (함민복시인). 앞산은 훌쩍 한걸음 다가오고, 모시바람은 맨살에 선득선득 쌔에 한데, 어화, 산은 날로 웅숭깊고, 강물은 갈수록 그윽하니, 또 한해가 이렇게 속절없이 가는구나.
음력 팔월 열나흘 달밤, 온 식구 둘러앉아 오순도순 호호깔깔, 송편 빚었던 일 아련쿠나.
추석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저 달빛엔 꽃가지가 휘이겠구나!”/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달님도 소리 내어 깔깔거렸네. - 서정주 「추석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전문
햐아, 시인님은 역시 다르구나. 달빛에 꽃가지가 휘어지다니! 마당귀 족두리꽃이 허리 잡고 웃으신다. 식구들도 왁자지껄 한바탕 웃음꽃 피우고,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에 살짝살짝 눈시울 붉히도다. 험한 세상, 이러구러 사느라고 너도나도 애썼구나! 아버지 어머니 송편은 정갈하며 마침맞고, 퇴직 앞둔 큰놈 송편은 여릿여릿 가늣하다. 장사치 둘째놈 송편은 크고 투박한데, 만삭의 막내딸 송편은 어찌 그리 앙증맞고 깜찍한지. 어쩜, 예쁜 외손녀가 오시려나.
서울송편 한 입에 쏙! 예쁜데 얄밉도다. 쑥, 송기, 오미자, 치자로 알록달록 물들였으니, 눈으로도 맛있구나. 강원도 쫄깃쫄깃 감자송편, 덤덤한 도토리송편, 무생채 소로 넣은 무송편 모두모두 소박하다. 충청도라 호박송편, 수저로 꽃잎모양 국화송편 은근슬쩍 볼만하다. 전라도라 모시잎송편, 화사한 꽃송편에, 차지고 졸긴 삘기송편 새록새록 으뜸이라. 경상도라 칡송편 큼직하니 배부르다. 제주도라 둥글납작 완두콩송편 독특하고 구수하다. 황해도라 손자국송편, 서울송편 3~4배라 한 개만 먹어도 배불뚝이, 함경도라 언감자송편, 평안도는 조선간장 간하는 조개송편이 깨소금맛이라.
추석날 아침, 온 식구 둥근 두레밥상 둘러앉아, 이 송편 킥킥 저 송편 깔깔, 하하호호 무시로 박장대소, 웃음꽃 다발로 피어난다. 이 송편은 큰놈이, 저 송편은 막내딸이, 울퉁불퉁 삐뚤빼뚤, 모두가 한 뱃속에서 나왔건만, 어찌 이리 손재주는 제각각인지. 문득 아버지송편을 한입 베어 무니, 목젖이 뜨뜻해져 목이 메어 오고, 어머니송편은 그저 하릴없이 눈길만 주다가 앞이 뿌옇게 아득해진다. 모진 세월, 우리 모두 여태껏, 어머니 아버지 살점을, 이렇게 사정없이 베어 먹고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