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살롱

일제 치하에는 식민지 쟁탈과 경영을 위해 학자적 양심을 내던진 어용의 일본학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연극분야에는 인나미 다카이치(印南高一)라는 와세다 대학의 연극학 교수가 앞장을 섰다. 그는 일본 전통연극의 우수성을 선양하는 한편 중국의 그림자연극, 한국연극에 대한 저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발간한 「조선의 연극」(1944)은 자신의 발로 뛰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한국어로 쓰여진 김재철의 「조선연극사」(1933)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를 발췌, 편집한 것이어서인지 본문에는 새로운 내용이 하나도 없다.
다만 서론의 조선연극에 대한 식민주의자적 기술이 눈길을 끈다. 그에 의하면 조선연극은 극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문화가 부재한 것으로 평가되며 그렇게 된 이유는 조선시대가 불교 대신에 유교를 숭상하여 연극을 통제, 억압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학문적 논거가 결여되어 있다. 극장이라는 것을 서구적 시각에 두고 가부키극장이나 파리의 오페라극장을 그대로 모방하여 건축한 긴자(銀座)의 제국극장을 기준으로 할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조선에는 엄연히 궁중, 민간, 산야에 자연친화적 극장공간이 존재해 있었다.
조선시대의 연극이 유교적 국가경영의 폐해로 인해 번영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애초부터 막혀 있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선 팔도 지방마다 전통가면극이 존재하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판소리라는 서사적 음악극이 번성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인나미 다카이치의 억지주장에도 경청할만한 것은 있다. 그것은 당시의 조선연극이 과연 일본연극에 대등할만한 풍부한 연극유산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노오, 분라쿠, 가부키로 대표되는 일본 전통연극의 풍부한 연극유산과 명치유신 이후 국가적 운명을 내걸고 적극적으로 서구에서 유입한 결과로 얻어진 근대연극의 괄목할 성과를 기준으로 하여 당시의 일본연극과 조선연극의 현격한 차이를 인식한 나머지 비논리의 시각으로 조선연극을 비하한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전통연극은 귀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것은 빛바랜 살구에 불과하다. 전통연극의 담당자들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창작적 노력을 게을리 하는 가운데 애호자들은 서서히 굿판을 떠나가고 있다. 서양연극의 유입에서 시작된 현대연극도 창작적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현대연극은 지적 탐구가 없는 실천 일변도의 기형적 양태를 연출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연극이 만성적인 번역극시대를 마감하고 창작극시대로 진입한다고 고무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간의 착각에 그치고 말았다. 민족극과 마당극의 소란한 기억이 사라지고, 지금 한국연극은 창조문화라는 허망한 구호 속에서 번역극과 라이선스 뮤지컬의 번영을 한국연극의 힘이라고 착각하면서 더욱 창작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40년대 어느 식민주의자가 비논리적으로 지적한대로 다시 한 번 일본연극의 비하적 평가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