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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춤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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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제전 주역을 맡아 후회없는 무대
- 독일 칼스루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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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를린 콩쿠르.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고, 발레리나의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잡게 해준 계기가 된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갈라 공연이 끝난 후 너무 행복한 마음으로 무대에서 나왔는데, 알지도 못하는 타지의 외국인들이 뜨거운 박수와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 따뜻한 관객들의 마음 덕분에 지금까지도 내가 무대에 서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발레를 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독일과 나는 이때부터 작은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후, 발레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한 걸 많이 느꼈다. 욕심이 나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타고난 게 많지 않다. 항상 골반 통증에 발목 통증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 사실 많은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예원학교, 서울예고에서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실기시험을 본다. 중학교 때는 중하위권에서 항상 왔다 갔다 했었다. 어린 마음에 꼭 서울예고에 가야하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열심히 해서 서울예고에 들어갔지만, 내가 계속 발레를 하면 나중에 뭐가 될 수 있지, 이 길이 내 길이 맞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해왔던 것 같다. 사실 그런 고민은 요즘도 하고 있다. 아마 평생 이 고민을 가지고 갈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베를린 콩쿠르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국제무대에서 1등을 했고 처음으로 너무나 행복한 무대를 맛보았다. 그 후 연습을 할 때 무용실 안에서 만큼은 꼭 100%로 노력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정말 피부로 느꼈다. 고등학교 1학년 첫 실기시험에서 노력의 대가를 돌려받는 것처럼. 1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았을때 정말 많이 울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께서 실기시험 후 성적표를 나누어 주셨는데, 성적표에 숫자 1밖에 안 보였다. 나는 선생님께서 실수 하신 줄 알고 다시 여쭈어 보니, 종이에 적혀 있는 게 내 이번 성적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작품에서 모두 1등을 했던 것이었다. 그날 성적표를 들고 함께 많이 고생해주신 엄마와 정말 많이 울었었다. 정말 믿겨지지가 않았다. 모든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엄마는 항상 높이 올라갈수록 고개를 숙이라는 말을 나에게 했었는데 요즘도 그 말은 잊지 않고 되새기며 지켜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 참가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주일동안 정말 힘든 일정을 소화해야 했지만, 지금 어린 친구들을 보면 로잔의 무대는 꼭 한번 도전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많이 배우고 넓은 안목을 길러준다. 지금 로잔에 가게 되는 친구들이 있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일주일동안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즐겁게 춤추다가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로잔 콩쿠르를 통해 정말 운 좋게도 독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말 많은 고민을 하였었다. 가족들과도 어렵게 고민하고 있을 때 예전에는 한국의 프리마 발레리나셨고,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서울예고 선생님, 지금은 성신여대 계신 김순정 교수님께서 이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를 로잔 무대에 세워주신 분이셨다. 오랜 고민 끝에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하여 콩쿠르에서 돌아오자마자 준비하여 그해 여름에 만하임 대학교로 가게 되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타지 생활에 발을 딛게 된 것이었다.
만하임 대학교는 시스템이 달라 매년 오디션을 본 뒤 학생의 실력에 맞게 학년이 정해졌다. 나는 바로 대학교 4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은 1년이라도 빨리 무용수들이 학교를 마치고 프로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이런 시스템으로 이어 가고 있었다. 무대에 서는 무용수는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짧은데 나는 3년이라는 시간을 더 단축하고, 그 시간을 더 무대에서 춤 출 수 있도록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때 나이가 만 17세였다. 학급에서 가장 막내였다. 처음엔 언어가 되지 않아 1년 동안은 정말 수줍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학교 총장님께서 칼스루에발레단 단장으로 계셨는데 대학교 졸업 즈음 칼스루에발레단 입단 제의를 하셨다. 그때는 아직 학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대학원에 가겠다고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 대학원에 가서 또 한 번 고등학교 때 나갔던 베를린 콩쿠르에 시니어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은 콩쿠르에 나가게 되면 엑스트라로 수업을 굉장히 많이 하지만 독일에선 원래 있던 수업에 작품 한두 번 더 해보는 게 끝이었다. 콩쿠르에 나가게 되어 설레는 마음도 컸지만,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에서 준비해오던 과정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원 학생들은 모두 칼스루에발레단 공연에 참여했어야 했기 때문에 선생님께 콩쿠르는 정말 뒷전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독일에 와서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곳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연습 시간을 정해주기보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그때 주변을 돌아보니 모든 외국인 친구들이 스스로 연습을 하고, 발레를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이끌어주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조금씩 스스로 해나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베를린 콩쿠르에 나가 또 한 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대학원 1년을 마친 뒤 감사하게도 또 한 번의 입단 제의로 칼스루에발레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하자마자 『지젤』에서 6인무(pas de six)에 캐스팅이 되었다. 처음부터 꽤 큰 역할을 맡게 되어 너무 행복했고, 그 후엔 캐스팅에 조금 더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대학원 때도 『호두까기 인형』에서 중국춤 솔로에 캐스팅이 되어 큰 작품에서 작은 역할이지만 무대에 홀로 서는 역할을 맡았었다. 믿고 맡겨주시는 단장님 덕분에 좀 더 발레에만 몰두해서 캐스팅 걱정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겨울,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무대 리허설 중 발목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2주 후에 있던 공연에 서지 못하게 되고, 세 달 동안 무용실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2주 후 준비하던 공연에 관객으로 앉아 보게 되었는데… 모두 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데 내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부럽기도 하고 같은 무대에서 춤추지 못하고 관객석에 앉아있다는 것이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부상을 계기로 또 한 번 내 발레 인생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지금은 더 늦기 전에 겪을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잘 걷지 못할 정도로 발목에 부상을 당했는데 병원에서 깁스를 권하지 않았다. 깁스를 하고 생활을 하면 근육을 아예 사용하지 않아 돌아오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2주 동안 움직이지 않고 집에만 누워있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사실 많이 우울하고 슬픈 시간이었다. 그 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혼자 있었기에 어려운 점도 많았고 서러웠기도 했지만 발레단 동료들이 자주 놀러와 주기도 하고, 많은 응원도 해주어 큰 힘이 되었다. 재활치료를 받았던 곳에선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발레리나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아티스트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운동선수들처럼 조깅, 웨이트 트레이닝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간 재활치료센터에서는 주로 운동 위주였다. 처음에는 통증이 심해 거의 못했지만, 내가 다시 무용을 하며 필요할 근력운동, 보강운동, 체력을 기르는 운동까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가서 4~5시간동안 운동과 치료를 병행했다. 그 이후로 다치지 않기 위해, 더 건강히 춤을 추기 위해 시간이 될 때마다 발레가 아닌 다른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발레단 갈라공연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들을 초청해 세우는데 그 때 정말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많은 무용수들을 접하게 되며 정말 돈 주고도 못 보는 무대 뒤의 모습들까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희 발레리나가 갈라 공연에 와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처음으로 내가 무대에서 반했던 발레리나였다. 정말 숨죽이고 보게 됐던 무대였다. 같은 발레단에 있는 동료들도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고 칭찬하는데 괜히 내가 어깨가 으쓱했었다.
부상을 당한 후, 발레단으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예전처럼 몸이 돌아오는 데는 거의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1년이란 시간이 절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발레를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성숙해지고,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료들보다 1년이라는 시간이 뒤처졌기 때문에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무용실에 있는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즐거웠다. 이번 2015/2016시즌 첫 작품에선 코코 샤넬과 봄의 제전을 무대에 올렸다. 호주 안무자가 처음 안무하는 작품이었다. 부상 후 돌아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중에 『봄의 제전』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처녀역할을 맡게 되었다. 너무나 큰 작품이고, 오랜만에 큰 역할을 맡게 되어 너무나 기뻤지만 연습을 시작한 이후로는 안무가 너무 힘들어서 첫 무대 올라가기 전까지 혼자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첫 공연 전 3일, 어차피 무대에서 해야 하는 거 끝까지 한번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고, 온 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까지 가서도 끝까지 정신력으로 버텼다. 다행히 첫 무대는 후회가 남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안무자에게 가서 중요한 역할인데 나에게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니 안무자는 나에게 “You don’t have to say thank you to me. when I first saw you, you said that’s yours.(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너가 말했어. 그건 너의 역할이라고)”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 힘들었던 것, 마음 고생했던 것 모든 것이 풀어졌다.
벌써 독일 생활을 한 지 7년이 되었다. 요즘은 유럽에 시끄러운 일들이 많지만,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발레단에는 정말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있다. 독일, 브라질, 영국, 벨기에, 일본, 중국, 호주 등등…. 문화도 다 다르고 나이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로 지내다 보니, 분위기가 너무나 자유롭고 항상 시끌벅적 시트콤같이 재밌는 일들이 많다. 독일은 맥주가 굉장히 유명한데, 다양한 맥주를 마셔봤지만 정말 맛있긴 한 것 같다. 와인도 정말 다양하게 많다. 새로운 와인들, 다양한 와인들을 접하면서 내가 발레하는 데 새로운 감정이나 표현력을 더해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밖에 나가 외국어가 하기 싫고, 한국어가 그리울 때는 한국 드라마를 켜놓고 와인 한 잔씩 했다. 독일 집에서 30분만 가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는데, 친구들이나 지인이 오면 꼭 하이델베르크 구경을 시켜주러 간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면 성 위에 올라가서 전망 보고 내려와 유명한 독일레스토랑에서 돼지고기 요리인 학센과 독일의 돈가스인 슈니첼을 시키고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가까운 강 주변의 다리에 가서 높이 있는 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다리 위에서 보면 예쁘기도 하지만, 계단 위에 있는 숫자들을 세며 올라갈 때면 나의 발레인생에 대한 숫자도 어렵고 힘들지만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한 단계씩 쌓아 올릴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하이델베르크를 정말 자주 갔지만, 항상 가는 곳이 똑같아서 나중에는 하이델베르크 가이드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또 한 번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타지 생활하는 지금까지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철없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멀리 있지만 항상 생각해주고 응원해주시는 선생님, 친구들, 가족들 덕분에 항상 힘내서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했던 글을 써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김 순정 교수님, 글로 나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춤」지에도 정말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휴가를 끝내고 곧 다시 독일발레단 무대로 돌아간다. 언젠가는 한국 무대에서도 가슴 뜨겁게 춤 출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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