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관무기

■ 박명숙 안무의 『시간과 방을 위한 네 개의 풍경』(8월20~21, 27~28일 나루아트센터)
폭염이 이글거리던 팔월 끝자락 어느 날, 박명숙은 뜬금없이 미술관에 춤을 걸었다.
『시간과 방을 위한 네 개의 풍경』
“VR. MEDIA. PERFORMANCE” 큼지막한 부제(副題)에 일단 주춤해진다.
공연이 아닌가, 머뭇거리는데 로비에서 까만 고글을 쓴 사람들이 어떤 영상을 보고 있는 게 눈을 끌었다. 나도 썼다. 무용수들이 찐득한 뻘 위에서 뒹굴고… 시커먼 무용수들이 내게로 굴러오고… 어느 새 나도 그들과 한데 뒹굴고…. 고글을 통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속에서 ‘보는 나’와 ‘보여지는 무용수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이색 체험은 두고두고 되새김질 할 것 같다.
안쪽에서 요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다가가 본다. 작은 영화관인가. 어둠 속에 바투바투 당겨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팽팽히 당긴 실가닥들처럼 화면으로 직진, 거기, 무언극과도 같은 무용수들의 몸짓이 폭발하고 있었다. 10분 내외 분량의 영상물 세 편이 연속 상영되었다.
미디어 감상이 끝나고, 의자들이 치워지고, 간단한 무대 장치가 세워지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퍼포먼스를 시작하려나 보다. 한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독자적으로 혹은 연결감을 가지고 관객에게 다양한 관람의 경험을 선사하려는 주최 측의 의도가 읽혀졌다.
미술관 바닥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루다. 맨발의 무용수들이 마루 위에서 뛰어오르고 구르고 뒹굴며 퍼포먼스를 펼치기 시작한다. 나도 살며시 샌들을 벗고 맨발이 된다. 무용수들의 격렬한 몸짓이 마루를 통해 잔전류처럼 발바닥을 간질인다. 무대와 일체가 되어 춤의 내용이랄 수 있는 에피소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E1 빈방의 빛, E2 커튼과 거울 사이, E3 유예된 시간, E4 세상 끝의 풍경.
네 개 에피소드의 제목들. 쉽지 않은 주제들이다. 처음 현대춤을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안무가의 시놉시스를 예습하듯 입력하고(중무장을 하고) 무대를 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몸짓들의 연속 연속 연속. 괴로운 듯 뒹구는 저 몸짓이 시놉에서 본 ‘불확실한 정체성’의 표현인가, ‘인간소외’의 표현인가? 마치 퀴즈라도 풀 듯 꿰어 맞추려고 애쓰다 보니 공연장을 나올 즈음에는 머리가 다 지끈지끈했다. 그때 어둔 터널 속에서 헤매는 나에게 ‘한 마디 말’이 입구의 불빛처럼 다가왔다.
현대춤은 사유다. 사유(思惟; 생각할 思 생각할 惟), 비슷한 말 사고(思考).
이해했다. 현대춤은 각자의 개성대로, 시대감각에 맞게, 자신의 생각을 몸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춤이다 라고.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말 그대로 십인십색, 그러니 개인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는 현대춤이 어찌 발레처럼 한 켜에 이해될 수가 있겠는가. 하여 나는 안무가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춤을 본다. 무용수가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를 때, 그 순간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그것으로 좋다. 무용수가 온몸으로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할 때, 내 맘속의 괴로움을 힘차게 토해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시각으로 보니 무용수들의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동작이 그대로 나의 동작이 되고 나의 해석이 되었다. 박명숙의 춤 역시 그렇게 보았다. 제목에 갇히지 않고 안무가의 의도에 묶이지 않고.
짧은 지면이지만 세련된 무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극도로 미니멀한 무대장치가 실험적인 춤과 잘 어울렸다. 하나의 영상이 투사된 입체적인 세 개의 벽은 각 에피소드의 주제를 확장시키는 역할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번 버추얼리얼리티 미디어 퍼포먼스(VR. MEDIA. PERFORMANCE) 『시간과 방을 위한 네 개의 풍경』은 무용과 과학기술이 결합한 ‘제 3의 작품’으로 현대춤의 지평을 성큼 넓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늘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박명숙의 다음 행보에 더 큰 기대를 품게 되는 이유다.

■ 박명숙 안무의 『에미』(9월23~24일 나루아트센터)
『에미』는 20년 동안 국내외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진화되어온 작품이다. 그런 만큼 2016년 버전 『에미』는 처연한 서사에도 시종 에너지가 넘치고 화려한 볼거리가 눈을 끄는, 한 마디로 보는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 되었다. 또한 늙은 에미의 독백은 객석과 무대의 거리를 좁혀 관객이 쉽게 다가오도록 허용한 친절한 작품이기도 하다.
객석 한쪽에서 에미가 등장하며 무대가 열린다. 관객들은 이미 그 초라한 행색만 보고도 그녀의 삶을 그릴 수 있다. 밖으로만 떠도는 허울뿐인 남편 ‘그 양반’과 ‘막내야’로 짐작되는, 제비새끼들처럼 입 벌리고 에미 손만 쳐다보는 올망졸망한 자식들로 인한 고단한 에미의 삶을.
이런 전형적인 한국 에미들의 지난한 삶을 박명숙은 우리의 전통 의식에 근간을 두고 현시대적 배경을 첨가한 새로운 형식의 무대로 형상화했다.
그런 맥락에서 『에미』는 페미니즘의 전형성을 보이며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는 진혼의 춤으로 읽힌다. 그러나 박명숙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에미가 삶의 종착역으로 떠밀려가며 겪는 일들은 딱히 에미만이 겪는 일이 아님을 곳곳에서 시사한다. 가령 응급침대에 누운 에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싸우는 사람들, 남의 눈 상관없이 뻔뻔스레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녀들, 직업적 습관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 등은 너나 없이 지금 우리 모두가 당하는 일들이다. 이렇게 『에미』는 열린 구조로 현 동시대인들의 아픔을 되짚어보게 한다. 뼈대만 남은 우산과 보잘 것 없는 보자기의 상징 또한 우리네 삶의 남루함을 X레이 사진처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신비로운 조명과 싱그러운 대나무 숲으로 형상화한 무대는 그 화려함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비극의 장엄함을 극대화 시킨다. 조명을 받아 요요하게 빛나는 대나무 숲이 바람결에 넌지시 전한다. “삶, 그거 아무 것도 아니야. 죽음 역시도 별것 아니야.” 한바탕 난리굿을 벌이던 무대가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저마다의 사유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에미의 독백에 대하여; 관객의 이해를 돕는 순기능 못지않게 전체 흐름에 덧칠을 한 것 같은 역기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가 너무 많다. 내용의 중복도 거슬린다. 더욱이 쥐새끼 언급은 뜬금없고 그 상징성은 생각보다 크다. 섣불리 들여온 생쥐 한 마리가 전체 내용에 혼란을 주고 있다. 있는 상징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하나를 더 보탤 필요가 있을까.
사족; 『에미』와 『Mother』 사이의 거리가 지구와 달 사이만큼이나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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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현숙 소설가: 서울출생.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계간 「작가세계」에 중편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로 등단. 장편소설 「인샬라」(전 2권), 「루마니아의 연인」, 「에어홀릭」. 소설집 「나의 푸르른 사막」,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열린문」. 수상: 작가세계 신인상. 한겨레신문 문학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출판인협회상. 백상예술대상(시나리오 부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