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댄스시어터창 10주년기념공연 김남진 안무의 『EYE(눈)』, 『씻김-PLAY(연극)』(9월24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EYE(눈)』
‘나’는 축 늘어진 채 모로 누워 있다. 끈에 매달린 인형이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힘겹게 끌고 간다. 조종당하는 인형이나 질질 끌려가는 ‘나’나 자발적인 의지가 전혀 없다. 애처로울 만큼 무기력하다. ‘끌려가거나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는 수동태의 몸짓이다. ‘나’는 팔과 다리를 180도로 벌리고 바닥에 엎드려 흙토자가 된다. 땅을 짚고 벌떡 일어날 것 같았지만 곧 맥없이 돌아 눕고 만다. 또 뒹군다. 굼벵이처럼 미련스럽게 바닥을 고집한다.상체를 추켜 세우는 듯 하다가도 기껏 원숭이처럼 발을 머리에 갖다 대는 게 다다.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거세 당한 ‘나’는 산송장처럼 공허하다. 메마른 눈으로 바라보던 세상은 끝내 껍데기가 된 나를 집어 삼킨다.
‘내’ 속에 사는 내면의 아이는 나를 빼앗아간 현실을 거부한다. 인형의 피동형 삶과 하얗게 치장한 현실의 부조리를 보고 경악한다. 거기서 생긴 생채기는 ‘나’와 함께 눕고 구르고 걸으면서 분노와 두려움의 피를 토해낸다. 그런 아이도 딱 한 번 번개같이 긍정의 미소를 짓는다. ‘내’가 아이를 목말 태우고 진짜 나로 곧추섰을 때다. 그 뿐이다. 내가 없는 현실은 꿈이다. 세상을 한 바퀴 돌아 벽에 걸린 옷을 덧입을 때마다 육신을 고쳐 얻는다. “꿈이로다.” 알면서도 하얗게 더께가 앉은 허위의 세상에 들어가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된다. 마침내 현실은 피로 물들고 ‘나’는 세상의 하얀 벽을 힘껏 부순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인형은 다시 하얀 길을 소름 끼치도록 힘없이 걷는다. 객석에도 뽀얀 가루가 날린다.

『씻김-PLAY(연극)』
“아부지 식사하셨으예?”로 공연은 시작하지만 몸짓과 음악엔 사투리가 없다. 아버지는 몸부림치며 죽음에 저항한다. 중년의 무용수는 격렬한 동작을 소화한다. 자기 얘기하듯 능란하다. 종국엔 상여 소리에 승패가 갈리고 아버지는 느릿느릿 고단한 삶의 허물을 벗는다. 벗은 옷을 내려놓으며 육신에서 벗어난다. 집착을 버리고 대자로 눕자 번뇌도 흩어진다. 구멍을 일일이 솜으로 틀어 막고 술잔을 기울이고는 “술 맛 좋다”며 허무의 감미에 취한다. 하얀 육신을 뿌리며 중음계로 쓸쓸히 걸어간다. 죽은 자는 홀연히 떠나지만 산 사람의 가슴엔 생음악처럼 의문부호가 박힌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관객들의 촉촉한 눈가에도 의문문이 맺힌다. “아부지 식사하셨으예?”

■「2016 장애인국제무용제」(9월8~10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호르디 코르테스 안무의 『작은 시클라멘』
가주는 거였다. 봐주는 거였다. 껍데기 교양시민의 관대함을 시늉하자는 거였다. 도덕적 허영심을 채워보자는 심산이었다. 객석은 제법 찼지만 듬성듬성 비어 오와 열의 질서가 깨졌다. 방만하게 꿍기고 있을 핑계거리까지 얻었다. 빛이 두 여자에게 닿는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는 긴 머리를 얼굴 앞으로 풀어 헤친 채 두 팔을 들어 허공에 유선형의 기호를 그린다. 또 다른 여자는 발 모양이 달린 원통을 다리 사이에 끼거나 타고구르며 희롱한다. 왼 무릎 아래가 없는 다리를 옆으로 뻗어 바닥과 수평을 이룬다. 떨어져 있던 두 여자가 만난다. 한 발로 선 여자는 앉은 여자의 손을 잡고 휠체어를 빙 돌린다. 그때 마음에서 빗장이 덜컥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타와 약음기를 끼운 트럼펫 연주 소리가 두 여자의 몸짓에 맞춰 가늘게 요동친다. 쓸쓸함이 가득한 음악은 어느새 낙엽이 돼 그녀들의 머리며 가슴에 떨어진다. 두 손과 한 발로 땅을 짚고 짧은 발을 뻗어 올릴 때 낙엽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서 있던 여자가 앉은 여자의 무릎 위에 가로 누워 열 십자를 그릴 땐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두 다리로 상대의 허리를 두르고는 하늘을 본 채 상체를 뒤로 젖혀 아래로 향한다. 객석에도 부드러운 찬 바람이 스민다. 눈물이 고였다. 두 여자가 탄 휠체어는 곡선으로 또 직선으로 미끄러지며 낙엽을 홍해처럼 갈랐다. 팅커벨 요정이 마법가루를 뿌린 것처럼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여긴 무대가 아니다. 애초부터 그녀 둘이 사는 곳이다. 낯섦이 없고 자연스럽고 능숙하다. 보이는 빛이며 들리는 음악, 반석 같은 무대가 의식주인 것 같다. 춤엔 끝이 구부러진 걸쇠가 없다. 남의 말과 시선에 고리를 걸어 뒤돌아 보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동작 하나 하나 바람처럼 걸림이 없다. 새처럼 자유롭다. 꾸미거나 가릴 필요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앉은 여자가 속삭인다. “어둠 속에선 빛이 더욱 환한 법이지요.” 편견과 선입관으로 가르고 차별하는 어둠 속에서도 자유로운 ‘나’는 한 줄기 빛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이다. 휠체어에 겹쳐 앉은 여자가 의족을 거꾸로 들어 잔을 들이켜는 시늉을 하며 무대를 빠져 나간다. 그녀들은 어둠까지도 빛처럼 즐기고 있다.

김형희 안무의 『컴! 컴!(Come! Come!)』
흰 주단을 밟고 건너온다. 어둠의 세상에서 거짓 없는 땅으로 여럿이 하나가 돼 넘어 온다. 뒤뚱거리며 어눌하게 입을 벌린 채 지팡이 짚고 중구난방 떠들며 당도한다. “하바나길라(이스라엘 민요: 우리에게 기쁨을!)” 노랫소리가 티끌 없는 축제를 선포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춤을 춘다. 안무가 없을 리 없겠지만 제 멋대로다. 팔 다리가 가로 세로로 어긋나고 스텝이 엇박자로 꼬인다. 그래도 신명이 묻어난다. 참 진솔하다. 핏발선오감이나 근육 진 두 다리가 아니어서 편하다. 두려움의 가면 숨김의 갑옷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진짜 나를 춤추니 뭉클하다. 그분의 피와 살, 포도주와 빵으로 참된 나로 거듭남을 축하해 마땅하다. 흠 없고 온전한 그들에게 경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