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관무기

■ 미나유 안무의 『뉴 월드 오더』(9월10~11일 M극장)
#멸종
고릴라가 앞으로 10년 이내에 멸종된다고 보고되었다. 더 이상 자연상태에서 생존이 불가하다는 건데 이유는 살 곳이 없기 때문. 고릴라 종이 기나긴 세월동안 킹콩(!)까지 만들어가며 호모 사피엔스 종과의 영역전쟁에 고군분투 했으나 패퇴했다. 영역전쟁에서 지면 멸종이다. 지난 9월 중국 항저우에서 G20 회의가 열렸다. 세계 경제 활성화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나 개별국 사이의 영토문제는 조그만 논의도 이뤄지지 않는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걸 서로 안다. 뒷골목 건달 세계는 두말 할 것도 없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학습(?)되어 우리는 알고 있다. 나와바리 수호는 조직의 생명선이며 목숨 그 자체라는 걸.

#신자유주의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여러 전시회가 열린다. 회화, 수묵, 조각, 공예 이외에도 건축, 영상, 퍼포먼스까지 하는데 지난 9월 열린 퍼포먼스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의 협업은 미술과 무용, 장르 사이의 이분법을 폐기하고 각자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중략) 신체의 한계 관습적 공간 규정된 사고에서 벗어나…(후략).”
지난봄 도쿄신미술관에서 이세이 미야케 전시회를 보았다. 엄청난 규모의 패션전시회라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서울에서 패션전시회는 소규모 콜라보나 곁다리 전시만 본 기억이 있고, 현대미술관에서 한 작가의 작품을 대규모 전시하는 건 아직 본적이 없다. 그럴만한 작가나 브랜드가 없는 걸까. 하여튼 미술관은 엄청난 흡입력으로 주변의 장르들을 끌어당기며 중력을 증폭시킨다. 옆 장르에서 튀어나오는 나오는 것을 모조리 끌어당긴다. 점점 소용돌이는 강해지고 숨가쁘게 빨려들어간다.
뮤지컬이 있다. 현대 무대공연물의 왕좌를 지키는 뮤지컬. 뮤지컬은 기존 오페라의 노래와 캐릭터에다 대사, 모든 종류의 춤, 영상기술, IT기술, 기계장치까지 첨단화하여 무대 위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무대예술의 상업적 성공은 뮤지컬밖에 없다. 누가 뮤지컬을 이길 것인가. 뮤지컬 역시 엄청난 흡입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TV와 아이돌이 있다. 이들의 댄스는 학교와 청소년을 장악했다. 초등학교 방과후수업의 ‘방송댄스’는 조기마감이다. 아이들에게 춤은 아이돌이다.
미술관은 누군가 만든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것은 모두 미술이라 주장하며 끌어들이고, 뮤지컬은 그럴듯해 보이는 건 몽땅 무대로 가져가 삼켜버린다. 아이돌은 유행을 만든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이며 FTA 적극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영역분쟁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협업이며 교환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실체는 분명해진다. 그들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거다. 어쩔 것인가. 이들은 현대춤의 영역을 잡아먹고 아껴놓은 보물을 약탈한다. 영역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상태에서 생존이 가능하다. 현대춤은 자연상태에서 생존이 가능한가? 멸종인가? 고릴라인가?

#춤도 영역을 넘어가자. 과감하게
미나유의 『뉴 월드 오더』를 보았다. 이 작품은 댄서 개개인의 역량이나 테크닉에 의존하지 않는다. 구성과 연출력에 중점을 두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좌측 상단에서 세 명이 작업복을 입고 드릴 작업을 하고 있다. 먼지와 소음을 내며 벽돌을 깬다. 두 명은 무대 우측 앞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른다. 한참을(약 5~6분)을 먼지를 내며 작업을 하더니 잘 생긴 댄서가 앞으로 뛰어 나오며 ‘누가 치우지’라며 소리 지른다. 그러고는 모두들 우당탕탕 슈퍼마켓 카트를 끌고 나와선 청소를 시작한다. 카트 안에 깨진 벽돌, 나무토막을 싣는다. 쓸고 치우고 닦고 진공청소기까지 난리법석. 청소 끝나는 곳까지 14분정도 경과. 그러곤 두세 명이 나와선 한참을 밀고 당기다가 한 명 사망, 카트에 실린다. 30분경과. 공연 끝. 새로운 세계에서 인간은 깨진 벽돌이나 나무조각 취급을 받는 것인가. 그러나 새로운 세계는 새롭지 않다. 이미 여기 와있지 않은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시작 부분의 강렬함이 청소장면 이후에 상당히 감소하고 긴장감이 떨어졌다. 남성댄서 이인무가 약하다. 뉴월드를 강조하는 데는 다른 무기들도 필요하지 않을까. 소품, 효과, 연기, 음악, 대사 등등 더욱 과감하게 사용하자. 100중에 51이 무용이면 무용아닌가. 과감하자. 춤도 영역을 넘어가자.

■ 이경은 안무의 『조용한 수다』(9월10~11일 M극장)
#모리스A
베토벤 7번 교향곡은 무대에서 영화에서 춤으로 만난다. 7번을 듣고 있으면 몸이 스프링처럼 붕붕 오르는 느낌을 받는데 무대에서도 남성댄서가 솟아오른다. 힘찬 음악과 춤을 보게 되는데 과연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은? 4악장은 긴장감 속에서 주제의 제시, 압박, 망설임 등이 소용돌이 치다가 베이스의 독창 4중창 합창으로 주제가 극적 구현되는 것인데, 9번으로 춤을 춘다면 7번과는 또 다른 대작을 구현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누가 이곡으로 춤을 췄을 텐데, 기억이 안난다. 모르는 거다.
퓰리처 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명작가 에드먼드 모리스(Edmund Morris)는 「베토벤(Beethoven; Universal Composer)」에서 자신의 이 4악장 체험을 말하고 있는데, 그가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을 극적으로 체험한 곳은 공연장이 아니었다. 미국 동부에 몰아친 눈보라로 도시가 마비되어 강제휴업이 선포되고 동네 언덕이 스키장으로 변모할 때 누군가 2층 창문으로 스피커를 내놓고 볼륨을 높인 것이다. 눈 덮인 고요한 아침 트럼본 소리가 공간을 찢어발긴 것이다. 이렇게 쓰고 있다. “Nothing was ever so loud, so bright as that C-major fanfare.(너무나 크고 깨끗한 관악기 소리에 모든 사람이 굳어버린다.)”

#댄서의 집중력
공연의 시작. 여성 댄서 4명이 서 있다. 갑자기 팡파레가 울리는 것이다. 나도 모리스만큼은 아니어도 놀라서 잠시동안 춤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게 그거 맞자나, 맞어. 이걸로 4명이 춤을? 당황스러움 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음악이 바뀌길 기다렸다. 허나 그칠 생각을 않는 거다. 계속 갈 모양인 거다. 게다가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도 어딘지 모르겠다. 너무 질러 대는 것 같은데…. 일단 따지지말고 그냥 보고 듣자. 내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보다 여기서 베토벤을 만난 즐거움이 솟아올라 그때부터 음악이 들리고 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네 명의 춤이 너무 재밌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음표처럼 키재기를 하며 깔깔대기도하고 악기가 소리내듯 움직이기도 하고 또 곡 전체의 감정선을 타고 군무도 하기도 하면서 음악과 너무 잘 어울려서 안무자가 작품을 위해 음악을 들은 게 아니라 원래 베토벤을 사랑해서 자연스럽게 춤으로 연결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네 명의 댄서의 집중력과 몰입도는 대단했고 음악과 어울려 관객과 함께 끝까지 달렸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혹시 음악은 베토벤 피아노 삼중주 7번 「대공」은 어떠신지?

#모리스B
9번 교향곡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수소문. 몇몇 분께 메시지를 보낸다. 답! 모리스 베자르. 엇, 베자르가 언제 9번으로 작품을 했지? 갖고 있는 책들을 넘겨보나 주요작품 리스트에 없다. 구글검색! 베자르의 9번은 1964년에 파리에서 체육관 행사용으로 공연, 1996년 파리오페라단의 요청으로 재공연, 2014년 베자르와 서로 죽고 못살았던 일본 도쿄발레단이 NHK홀에서 주빈메타 연주에 맞춰 로잔과 함께 공연. 영국 아마존 디비디 가격 25파운드. 궁금한데 어떡하지, 알려준 지인에게 다시 물어본다. 답! 유튜브.
모리스의 9번을 본다. 주빈메타의 소리역시 이경은의 작품에 사용된 번스타인과 흡사하다. 미국 지휘자들은 관악기를 풀로 쓴다. 정통 독일파는 안 그런다. 4악장을 찾아본다. 4악장은 약 30분 소요. 시작해서 베이스가 노래할 때까지가 5분에서 6분인데, 모리스의 작품에선 이경은과 반대로 4명의 남성 댄서가 그 5분 동안 춤을 춘다(그 이후엔 군무). 철저하게 베토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음악과 매치시킨 안무. 남성 댄서의 몸이 정말 아름답다.

#진실과 거짓말
이 글을 다 쓰고 팜플렛을 열어본다. “이 작품은 주어진 환경과 제약된 상황에서의 조용한 수다를 통해 정작 말하고 싶은 진실과 듣기 좋은 거짓말 사이를 본다”라고 쓰여있다. 미안하다. 안무의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꼭 그걸 느껴야하는 건 아니겠죠?

# 확장성과 정면승부
난 현대춤의 방향성을 두 작품에서 본다. 미나유의 드릴과 이경은의 베토벤. 확장성과 잔꾀부리지 않는 정면승부. 그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