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어릴 때 등하굣길 꿀물을 빨아먹곤 했던 꽃. 친구들끼리 그저 꿀꽃, 꿀꽃이라고 불렀던 꽃. 알고 보니 사루비아였더랬지요. 사루비아 꽃 핀 개울 건너편에는 속칭 미아리 텍사스라 불리던 사창가가 있었는데요. 그때는, 사루비아를 꿀꽃이라 부르던 그 무렵에는 그 누나들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때는 몰랐더랬는데요.

“눈물에 젖은 장미들이 웃음을 파는 거리 / 사람들의 비웃음도 자장가 삼아 / 흩어진 머리 다듬고서 내일을 꿈꾼다오 / 그 언젠가 찾아가리 해 돋는 집으로 / 꽃피는 마을 내 고향에 어머님 곁으로 / 햇빛 없는 뒷골목에 꽃은 시들어 / 외로운 사연 넘쳐 흘러 설움도 많다오 ♬”

김상국의 「해돋는 집」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무슨 뜻인지 알았을 때, 그 무렵 비로소 꿀꽃이 아니라 사루비아라는 것을 알았더랬는데요. 사루비아를 볼 때마다 텍사스 햇빛 없는 뒷골목 홍등이 아련해지고, 홍등을 볼 때마다 붉은 사루비아가 아련해지는 까닭입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추석.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붉은 사루비아 꽃들이 흐르러지게 피었더랬는데요. 장인어른을 아직 보내지 못한 장모님은 사루비아처럼 붉은 눈물 뚝뚝 흘렸더랬는데요. 가을이 이울어도 이울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미련인지 아니면 미련함인지… 글쎄요…. 아직 꺼지지 못한 조등(弔燈)인 듯, 님 그리는 홍등(紅燈)인 듯. 사루비아 그렇게 흐드러지게 피었더랬는데요.

붉은 혀
뿌리에 닿아봤으니
되었다 되었다며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서산에 들고
가을도 저만치 이우는데
사루비아
사루비아
무슨 미련이 남아
홍등(紅燈)을
밝히고 있느냐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가고 없는데
붉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니나노
니나노
불러도 오지 않는 이
무슨 미련이 남아
홍등을 밝히고 있느냐
- 졸시, 「사루비아, 니나노 그리고 홍등」 전문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루비아는 샐비어(Salvia)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나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마침 이런 기사도 있네요. (스포츠경향, 2010년 7월 11일자)

“‘샐비어’를 ‘사루비아’로 부르는 것은 일본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ㄹ’ 받침 발음을 잘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샐비어’를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하고, ‘사루비아’라고 소리 낸다. 우리가 ‘ㄹ’ 받침을 소리 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샐비어’로 충분히 소리 낼 수 있는데도 일본 발음을 그대로 적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요 샐비어의 일본식 발음인 사루비아가 그대로 굳혀진 것이겠지요. 익숙해진 탓이겠지만 샐비어, 샐비어보다는 사루비아, 사루비아가 더 친근하고 어울리는 느낌. 아니 그것보다는 삶의 어떤 비릿함을 샐비어가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루비아에 담긴 그 비릿함 말입니다. 그러니 사루비아를 사루비아라 부른다고 부끄러운 일일까요? 글쎄요….
사루비아는 쥐의 꼬리를 닮았다 해서 쥐꼬리풀, 서미초(鼠尾草)라고도 하고, 깨를 닮아 깨꽃이라고도 한다는데, 실제로 보면 그럴 듯합니다. 쥐꼬리를 닮기도 했고, 깨를 닮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 사루비아를 어린 시절에는 꿀꽃이라 불렀더랬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불렀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브라질이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라고 하는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꽃말은 ‘정열’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왠지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벗은 듯 입은 듯 비키니에 화려한 깃털로 장식한 채 열정적으로 삼바춤을 추는 무희들… 사루비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로 뜨거운 태양 아래 춤을 추는 무희들 같기도 합니다.
사루비아를 노래한 시편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몇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바보사막이라 불렸던 故 신현정 시인의 유고시, 「사루비아」입니다.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 신현정, 「사루비아」 전문

생전에 선생께서는 엉뚱발랄 유쾌통괘 그런 시편들로 독자들을 달래고 위로해주었는데, 병상 중에 쓰신 「사루비아」만큼은 선생 특유의 유머가 보이지 않지요. 오히려 사루비아에게 수혈을 부탁한다는 대목에서는 선생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져 아픈 시입니다.
가을 햇볕 아래 새빨갛게 핀 사루비아를 보면 떠오르게 되는 시는 정 양 시인의 「사루비아」이지요. 새빨간 거짓말처럼 한사코 핀 사루비아. 사랑의 계절(여름)을 보내고 이제 이별의 계절(가을)인데, 아직도 사루비아 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붉은 몸짓을 보내고 있으니, 숨 막힐 법도 하겠다 싶고, 새빨간 거짓말이란 말도 그럴 듯하다 싶기도 하지요.

너를 안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거센 물길로 지친 산길로
너를 보내고
물길도 산길도 오만가지로
다 막히고
미친 바람만 그렇게도 불어쌓더니
선사(先史)의 어느 가을 햇살을 훔치어
너는 반짝이며 돌아오느냐
오만가지 그리움으로 눈이 부시어
미치다 만 햇살로 돌아오느냐
잊을 일도 버릴 일도 이제는 없는
햇살만 햇살만 뜰에 남아서
숨 막히어 훔쳐보는 사루비아꽃
새빨간 거짓말처럼
사루비아는 한사코 피어 있다
- 정 양, 「사루비아」 전문

마지막으로 장석남 시인의 시, 「꽃이 꽃을 지나」입니다. 가을 햇볕 아래 새빨간 거짓말처럼 한사코 피어 있는 사루비아. 그 사루비아도 가을이 지나면 마침내 새빨간 거짓말처럼 지고 말 것이니. 꽃은 반드시 꽃을 지나는 법이니. 사루비아를 시인의 눈으로 보면 이렇듯 한 삶과 한 죽음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사루비아 활짝 피어 스스로 사루비아가 되어갈 때 달래주어야만 해
전부가 영영 사루비아가 되지 않도록 쓰다듬고 다독여주어야만 해
피골이 상접한 저녁노을이 아주 오기 전에

모든 꽃은 사막으로 가지만
쇄락하라 쇄락하라 가을 볕
호흡(呼吸)마다 가쁜 색(色)을 뱉지만
거기 보탤 내 하나의 죽음은 아직 미숙하니

피어나는 모든 꽃 앞을 지날 때마다
갈증의 문답을 한다네
꽃이 꽃을 지나 사막으로 가는구나
꽃이 꽃을 지나 풀벌레에게로 가는구나
- 장석남, 「꽃이 꽃을 지나」 전문

사루비아 붉은 꽃이 붉다붉다 지고마는 시월입니다. 피골이 상접한 저녁노을이 아주 오기 전에 달래주고 다독여주어야 할 꽃 같은 당신에게, 꽃을 지나 사막으로 가고 있는 당신에게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