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

─ 공식적인 데뷔는 언제 어디서 하셨나요? 프로그램은요? 그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1970년대 현대무용계는?
* 대학을 졸업 하던 해! 그러니까 1971년 11월 명동 국립극장에서 첫 개인발표회로 무용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공연 타이틀은 『김복희·김화숙 현대무용』으로 작품은 1부 4像(상)의 디자인, 어느 날 오후에, 날아오르는 線(선), 아! 여기 꿈을 찾는 인간이, 의식의 빛, 함께 가야 한다. 이상 6개의 소품과 2부 法悅의 詩(1.眞我 2.번뇌 3.환상 4.희열 5.塔)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 나이에 교수 급들이 발표하는 극장을 빌려 오로지 창작에의 욕구와 열정만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공연을 벌였으니 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공연 현수막이 걸리던 날, 극장 앞에서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아마도 공연 날까지 매일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안무와 연습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의 문제들이 우릴 힘들게 했다. 우린 너무 빨리 무용사회를 알아 버렸던 것은 아닐까?
1970년대 초에는 1년에 무용 공연이 10회 미만이었기 때문에 무용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개인 공연이 귀했으며, 반면에 힘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현대무용’이라는 타이틀의 첫 개인 공연은 나의 스승이신 육완순 선생님이셨고, 그리고 『김복희·김화숙 현대무용』이 두 번째일 것이다.
어쨌건 우리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첫 공연을 통해 무용계에 환멸을 느껴버렸고, 공연을 끝내고는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그 이듬해 결혼이라는 현실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를 무대로 다시 불러낸 건 순전히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2회 발표회는 1975년 11월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컨템포러리 창단 공연에 신작 솔로를 발표했었다.
1979년 문화부 주최로 「대한민국무용제」가 처음 생기면서 지원금이 발레와 한국무용은 200만원 정도, 현대무용은 100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 현대무용만 지원금이 적은가에 대한 질문에 현대무용은 돈이 적게 들어서! 라는 주최 측의 설명(변명?)을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후배의 전화! 현대무용 분야 지원금이 적게 책정된 건 순전히 언니들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두 사람이 발표회를 너무 자주했기 때문이라나. 아무튼 그때가 20대였으니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더군다나 두 사람이 함께 하는데. 서울 공연도 모자라 지방 공연까지 추진했으니, 참으로 열정이 넘쳐흐르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 광주의 발레교육자 엄영자 선생에게서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춤을 시작하셨나요?
* 광주여고에 입학해서 무용반 학생들이 강당에서 바를 잡고 연습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바로 그 순간 춤에 매료 된 것 같다. 무용 시작이 다른 사람들보다 늦었지만 그 시절 광주여고 무용반은 이화여대 무용경연대회 3년 종합우승을 할 정도로 유명했다. 나의 고등학교 3년 연습량은 다른 사람들 10년 연습량과 같을 만큼 많았다. 극기 훈련을 받았다고나 할까? 지독하게 연습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날의 내 인내심과 끈기는 바로 청소년기의 이 혹독한 훈련 덕분이리라. 광주여고 무용반 별명은 ‘폐병환자’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햇볕을 쏘일 시간도 없이 무용반은 연습에 연습만을 반복했었으니까. 비 오는 날이면 연습을 쉬는 운동선수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약속한 시간만큼만 레슨을 해주는 요즈음과는 달리 그 시절에는 레슨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 수업 시간 이외에는 매일 늦은 밤까지, 주말에도, 휴일에도, 친구들은 소풍을 가도, 단체 영화관람 시간에도 오로지 무용반은 연습만을 반복했었다. 춤에 대한 몰입의 경지를 나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 무용수이자 안무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 ‘김복희·김화숙 무용단(1971~1991)’을 통해 김복희 선생과 공동으로 36작품을 발표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이형기 시, 백병동 작곡의 『징깽맨이의 편자』(1981)이다. 안무와 주역무용수로 출연까지 했던 이 작품은 3회 「대한민국무용제」 출품작으로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많은 비평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서울(문예대극장, 세종문화회관) 이외에도 광주, 대전, 대구, 부산지역까지 다니면서 공연했었고, 평론가회 추천으로 「일본 무용작가 10인 전」에 특별 초청되어 동경 공연! 그리고 파리시 초청으로 퐁피두 센터에서 5일간의 장기공연까지, 참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공연되었던 작품이다. 또한 남자 무용수들이 귀하던 그 시절에 가장 많은 남성무용수들이 출연했던 작품으로 故 송범 선생께서 이 작품을 보시자마자 분장실로 오셔서 진심으로 격려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기운이 샘솟았는지, 원로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내 단독 작품으로는 단연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1985~ )’를 통해 발표한 『광주민중항쟁 무용3부작』으로, 1부: 『그해 오월』(1995), 2부: 『편애의 땅』(1997), 3부: 『그들의 결혼』(1998)이다. 작품 구상부터 공연까지 5년이라는 기간 동안 광주라는 주제에 매달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작품에만 몰두하며, 긴 호흡과 에너지가 필요했던 작품이라서 그런지 더욱 애착이 가는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대극장, 중극장, 소극장이라는 극장의 특성에 따라 내 안무 방식을 최대한 적용해본 실험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예술의전당 세 극장(오페라극장-그 해 오월, 토월극장-그들의 결혼, 자유소극장-편애의 땅)을 섭렵하며 맘껏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특히 작품 스태프들(대본/한혜리, 무대/권오진, 조명/공준택) 까지도 한마음이 되어 협업을 했었고, 무용수들 또한 최선을 다한 무대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도 감사할 뿐이다. 이 세 작품은 1999년 「오월의 눈물」이라는 타이틀의 무용 CD Rom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번 사포 30주년을 맞이하여 『2부 편애의 땅』은 DVD로 출시할 예정이다.(어쩌면 화질 때문에 컴퓨터 파일로 출시해야 될지도 모르지만)

─ 선생님 작품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무엇인가요?
* 지금까지 80여 작품을 발표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주제를 표현한 것 같은데 작품은 늘 인간과 자연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주제가 역사적 사실이건 정치적 사건이건 간에. 동학(東學)을 주제로 다룬 『다시 핀 그대에게』(1996)는 102년 만에야 고국 땅을 밟은 동학농민군 유해를 무대에 모셔놓고 그들을 추모하는 입장에서, 『그대여, 돌아오라』(2005)에서는 남아있는 여인들의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광주민중항쟁 무용3부작 『1부 그해 오월』은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어머니의 시각에서, 『2부 편애의 땅』에서는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그리고 『3부 그들의 결혼』도 역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작품 전면에 스며있다. 또한 서정성 짙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달이 물속을 걸을 때』(2001), 『지나가리라』(2009), 『우리는 사랑 했을까』(2011) 그리고 사포30주년기념 신작 『사포의 겨울 숲』(2016)까지 결국 내 작품엔 인간과 자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 1971년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을 결성해서 활동하셨는데요, 한국현대무용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세요?
□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 20년은 참으로 척박했던 1970년대를 거쳐 무용계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198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한국현대무용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두 사람은 20년 동안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몰입했다. 두 사람 활동의 의미는 첫째는 현대무용은 외국무용이라고만 여겼던 그 시절 한국적 현대무용을 주창하면서 우리 것을 현대무용화함으로써 현대무용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놓은 점이다. 즉, 『법열의 시』(1971), 『춘향이야기』(1975),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1978), 『징깽맨이의 편지』(1981), 『요석, 신라의 외출』(1988) 등의 작품을 통해서.
둘째는 일반인들에게 현대무용이라는 용어가 낯설기만 했던 1970~80년대에 지속적인 발표회와 꾸준한 지방 공연을 통해 현대무용 활성화에 크게 기여를 했으며, 셋째는 새로운 창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무용계 전반에 창작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 2010년 춤40년을 기념해서 에세이집을 발간하고, 2015년에는 정년 기념으로 논문집을 발간 하셨는데요.
* 책 제목은 「김화숙의 춤길 40년_ 춤이 있어 외롭지 않았네」이다. 책 제목에 나타나듯 춤이 있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고, 또한 춤이 있어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춤은 곧 내 삶이었고, 내 삶 또한 춤이었다. 이 책 사진 속의 글 행간 행간에는 내 모든 인생이 담겨 있다. 그냥 사진만 보는 사람들에겐 스쳐지나가 버렸겠지만, 가끔은 사진 속의 글들을 읽고 메일도 보내오고, 문자도 보내오는 지인들이 있다. 그들의 몇 마디에 감동도 되고 위안도 받는다. 이렇게 이 책이 내 예술세계를 모아놓은 무용작품집이라면, 정년을 기념해서 출간한 「김화숙_무용교육의 지평」은 대학에 있으면서 내 연구 활동이 집약된 자료집이라고나 할까. 시기적으로 시급한 주제들을 논문으로 발표하다보니 거의 무용교육 관련 논문이다. 이 책 두 권은 바로 내 인생의 전 자산으로 나를 대변해주고 있다.

─ 무용교육혁신위원회를 통해 한국의 무용교육에 크게 공헌하고 계신데, 자랑 겸 홍보를 해주세요.
* 무교혁(무용교육혁신위원회 약칭)은 2002년 시작되어 어언 15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시작을 못했을 것 같다. 12년 노력 끝에 무용교사자격증 문제는 해결되었고, 지금은 ‘예술’교과에 무용을 포함시켜야 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무용계 원로 12분이 고문으로 계시면서 많은 힘을 실어주셨는데 지금은 여섯 분만 남아 계신다. 고(故) 김천흥 선생님께서 세종문화회관 궐기대회 때 주먹을 불끈 쥐고 “모든 국민은 예술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외쳐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끔씩 기운이 빠질 때면, 그날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예술교과에 무용 과목을 포함시키는 일은 전 무용계가 한마음이 되어 목소리를 높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무용교육의 효과성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학생, 학부모, 현장 교사, 교육 행정가들이 무용수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할 때 무용교과는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전 무용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교혁이 지금까지 많은 일을 추진해올 수 있었던 것은 공동대표 정승희 위원장과 박인자, 신은경, 김인숙 교수 그리고 장광열, 박희태 교수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함께 노력해주었기 때문이며, 후에 무교혁 활동에 흔쾌히 동참해준 김명숙, 임학선, 양정수 교수와 20여 명의 이사진들이 한 마음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트러블 없이 지금까지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음은 무용계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 3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전북지역에서 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를 창단해서 올해 무용단 30주년을 맞으시는데 지금 소감은 어떠신가요?
* 사포는 그동안 참으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30회의 정기공연, 20회의 야외 춤판, 35회의 소극장 시리즈를 단독으로 주최했으며, 50여 회의 초청공연까지 전북지역은 물론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등 전국을 무대로 활동해왔다. 사포는 직업 무용단체도 아니고, 오로지 춤이 좋아 모인 순수한 예술단체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가장 열악한 전북지역에서 30년을 버티어온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의미 있는 작품들은 문화예술계 자산으로 인정하고 적어도 20년 이상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나 무용가 개인에게는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포는 30주년 기념 신작 『겨울 숲』을 신청했으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 씁쓸한 기분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참고로 올 해 전북지역은 도내 무용협회들에게만 지원금이 주어졌다).
그래도 사포는 30주년을 맞아 사포의 역사를 기록한 「사포의 시간 1985~2015」을 출간하며, 2회 춤평론가상을 수상한 광주민중항쟁 무용3부작 『2부 편애의 땅』 DVD 출시하고 그리고 10월 15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신작 『사포의 겨울 숲』을 무대에 올린다.
30주년을 맞은 소감? 지역 무용단체로 살아남기! 40주년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 춤계 후배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춤은 가장 순수한 예술이다. 춤이 모든 예술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현란한 테크닉이 목적이 아니라 마음으로 춤을 출 수 있는 무용수, 그래서 춤을 통해 보다 순수한 인간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무용예술가도 될 수 있고, 진정한 무용교육자도 될 수 있다. 후배들이여! 춤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회! 춤으로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합시다.

■ 9월25일 이메일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