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집에서 직장이 가까울수록 지각할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추석처럼 긴 연휴가 있는 달일수록 원고마감은 늦어진다. 이번에도 그럴 위험성이 클 것 같아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밀린 일을 해치우고 난 새벽에야 책상 앞에 앉는다.
모두들 잠든 새벽에 불을 밝히며 자리를 잡으면 뭐라 할 수 없는 차분함 때문에 밤에 주로 글을 쓰게 된다. 차분하게 만드는 요소란, 고요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도시 한복판에 살면서 고요함을 찾는 것은 무리다. 노을이 지는 바깥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멀리서 들리는 기차의 기적소리에 하루가 다 갔다고 새삼 느껴졌을 때만큼 가끔가다 정적을 깨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라든지 특히 사이렌 소리에 되레 평안함을 느낀다.
대학시절, 뉴욕 한복판에 있는 기숙사에서 살면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원치 않는 수면의 방해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불안감이 어두움과 함께 엄습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 사이렌이 울려도 단잠을 잘 수 있는 경지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한 달에 적어도 두어 번은 야심한 새벽에 경찰차, 소방차 혹은 쓰레기 수거차 등에 의해 단잠에서 깰 수밖에 없다. 밤마다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는 한밤의 불청객이기는 하지만, 그 소리가 익숙해져 가면서 이를 받아들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인지 잠결에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불안감을 조성하며 잠을 깨우기보다는 나의 살아있음을, 그리고 무사함을 재확인하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시간에 그 누군가는 절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인데 말이다.

추석은 秋夕이다. 뭐니뭐니해도 이날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아침의 차례상보다는 저녁시간이다. 어릴 적에는 집안어른들이 개신교라 추석에도 제사 대신 큰댁에 모여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오후 늦게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나면 해가 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우리만의 추석이 시작된다. 그때만큼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도 보였던 단지 내 화단사이로 난 길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추석만 되면 다양한 연령대의 몇 명의 초등학생들이 한복차림으로 모여 있었다. 서로 모르는 아이들이 오합지졸 모였다면 어색하겠지만 신통하게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아이들은 그 자리를 맴돌았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만 정해지면 게 중 연장자가 리더가 되어 소박하게 게임을 진행하거나 강강술래를 하곤 했다. 그때는 지금 보다 날씨가 선선했음에도 한복에 땀이 배일 정도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놀다보면 베란다에서 귀가를 재촉하는 부모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여의도를 떠난 지 내년 7월이면 꼭 30년이 된다. 아직도 그 길목을 점령하고 아이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이를 하고 있을까.

추석이 되기 몇 주 전, 유치원 때부터 여의도를 떠나기 전까지 다녔던 교회가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옛 흔적이 많이 지워진 리모델링한 건물에서 각각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가 차례대로 찬송하는 형태의 음악예배를 드렸다. 어린이 성가대가 첫 순서를 맡았는데 예전엔 초등학교 4학년 정도부터 6학년까지였다면 지금은 단원들이 1학년에서 4학년 정도로 옛날보다 연령대가 훨씬 어려졌다. 그리고 중고등부가 맡았던 2부 성가대에는 성인들이 그 자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이들이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 아니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야 성가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이라 한다. 어느 면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가연습 하러 가는 것이 친구들을 만나며 집과 학교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전한 일탈이었는데 요즘의 어린 학생들에게는 이 시간마저도 용납이 안 되는 것 같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살기가 얼마나 갑갑할까 싶다. 이번 추석연휴에도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추석 보름달 아래 아이들이 모일 것이라고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된, 옛 추억의 슬픈 현실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2016 병신년의 추석은 예전에 비해 어수선했다. 추석 직전에 있었던 경주지역의 지진과 전국으로 이어진 그 여파로 명절연휴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온통 지진에만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지진 이후에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서울근교에서도 여진을 느꼈다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일까. 게다가 경제 불황 등 되는 일 없는 상황에서 전 세계적인 온난화로 날씨마저도 도와주질 않아 이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가위 같은 날씨는 없어진 지 오래다. 정말로 열대 오지가 사계절이 뚜렷해지고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들이 열대나라로 바뀌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생각하건데 인간의 욕심이 이만큼 과열 될수록 환경은 인간을 안 도와줄 것 같다.
덧붙여 이제 추석날에도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추석을 더욱 빈곤하게 만드는 것 같다. 게다가 요새는 제대로 만든 한복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추석이 되어도 고궁과 인사동을 제외하곤 한복차림은 어린이라도 보기가 힘들어진 지 오래다. 그리고 한복이라 봤자 금박과 은박으로 온통 도배된 조선시대인지 당나라시대인지 미래시대인지 구분이 안가는 국적불문의 형태의 의상을 외국인들에게 입히는 싸구려 문화가 고유문화를 희석시키는 요즘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기성 한복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들여온다는 것이다. 정비 안 된 상가의 간판처럼 자극적인 색의 나열에 도포도 갖추지 않은 채 머슴처럼 조끼만 입고 갓을 삐뚜로 쓰고는 좋다고 돌아다니는 외국인들을 보면 되레 내가 미안해진다.
연초에 동대문을 오가다 한 한복집에 걸어놓은 한복의 맵시가 아름다워 큰 맘 먹고 한복을 맞춘 적이 있었다. 국적도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은 요즈음의 퓨전한복과는 달리 고유의 복식을 지키려는 노력이 걸어놓은 옷에 투영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정 때에 입을 기회를 놓쳐 이번 추석연휴에는 마음먹고 제대로 된 한복을 입고 아내와 함께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박물관 인파 중에는 역시나 한복을 입은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를 외국인마냥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나쁘지 않았다. 어른들보다는 어린이들이 더 색감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외국인들은 당연히 우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어떤 외국인부부는 우리를 지나다가 아쉬웠는지 다시 와서 우리를 보고가기도 했다. 날씨가 덥다보니 오래 돌아다니지 못하고 집에 돌아온 아쉬움은 있었지만 한복입고 원 없이 사진도 찍으며 짧게나마 옛 정취를 제대로 만끽한 특별한 추석이었다.

가수 故 신해철이 사망하기 얼마 전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에 대해서 신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고있다”라고 말해서 큰 인상을 준 적이 있었다. 하늘과 조상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이웃끼리 정다움을 나누는 축제는 세계도처에서 서로 다른 시기와 다양한 형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우리의 추석 역시 어김없이 올해도 찾아왔고, 내년에도 찾아올 것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석 연휴에 맞춰 불안에 떨게 한 남북한 동시에 덮친 올해의 천재지변에 대해 ‘왜 하필 추석에’라고 원망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자연재해는 인간의 편의를 보며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점이, 그간 하늘의 넉넉한 천혜의 혜택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 대신 경쟁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 상대적으로 갈수록 빈곤을 양산해내는 요즈음에 여태껏 고즈넉한 추석을 선사해왔던 하늘의 배려가 새삼 그리운 오늘이었다. 여하를 막론하고 이 천재지변에 대해 민심을 수습하고 더 큰 천재지변이 생길지도 모르는, 언젠가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대처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으로 자족할 줄 알았던 우리 조상의 마음을 되새기며 겸허히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