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88올림픽의 열기도 가시고 20세기 마지막 10년이 시작되던 1990년 새해 벽두. 중앙일보에는 ‘세계 정상의 볼쇼이 발레단 첫 내한공연’ 사고(社告)와 연이은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실렸다. 88올림픽 때 ‘볼쇼이와 소련 발레스타’라는 타이틀의 공연이 있긴 했지만 이름 그대로 30명 정도의 공연단 중 볼쇼이 출신은 몇 명 안 되었고, 더구나 전막 공연이 아닌 갈라쇼(2인무 중심의 중요 하이라이트만을 보여주는 공연)였다.
발레 팬들이라면 꿈에도 그리던 볼쇼이발레의 전막 공연이 볼쇼이 220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것이다. 공연될 레퍼토리는 『백조의 호수』와 『지젤』. 공연단의 규모는 발레단과 오케스트라 단원, 기술진을 포함하여 250여 명이었다. 당시는 서울과 모스크바의 직항 노선도 뜸했고, 인원도 많아서 대한항공 전세기가 왕복으로 이들을 실어 날랐다.

3월28일~4월3일 사이에 열리는 6회의 공연티켓은 연초부터 예매가 시작되었다. 인터넷 예매는 물론 전화예매 시스템도 없던 시절이라 팬들은 서울시내 예매처에서 표를 구입해야 했다. 호암아트홀 로비에 마련된 매표소에서만 200여 미터에 가까운 줄이 서기도 했다. 마치 대한극장의 예매인파와 흡사했다. 하루에 무려 1천매 이상의, 그러니까 호암아트홀 좌석 수만큼의 티켓이 팔려나가면서 우리는 볼쇼이에 대한 한국 팬들의 관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넷 예매시대인 지금은 상상을 못하겠지만 빗발치는 문의 전화 때문에 일을 못할 정도였다.

당시 중앙일보에서 공연기획자로 입문한 지 1년도 안 되었던 필자는 운 좋게도 이 공연의 매니저를 맡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해에 헝가리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와 『지젤』로 입문했던 초보기획자의 세 번째 공연도 발레였고(두 번째는 프라하심포니오케스트라였다) 레퍼토리도 『백조의 호수』와 『지젤』이었던 것이다. 『백조의 호수』와는 이후로도 인연이 이어져서 나는 지금도 두 시간 가까운 그 음악을 거의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다.

예상했던 대로 공연은 거의 매진이었다. KBS에서는 『백조의 호수』를 녹화했다가 방영하기를 원했다. 당시에 웬만한 공연은 방송사들이 무료로 녹화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우리는 2만 달러를 저작권료조로 받아내서 단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재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무대에서는 기술진과 발레단원들의 무대 세팅과 연습을 도우면서 서로 많은 친밀감이 생겼다. 간간히 작업이 끝나고 술자리를 가지면서 그들의 문화도 배우곤 했다. 그들은 보드카보다 약한 소주대신 막걸리를 더 자주 마셨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좌중의 술잔을 채우고 덕담을 하고 나서는 ‘도드나’(‘바닥까지’라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는 ‘원샷’)를 외치며 함께 잔을 비우는 행동을 나는 지금도 가끔 술자리에서 하곤 한다.
공연 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으로 기억되는데, 회사에서는 발레단원들에게 불고기를 대접하기로 하고 강남의 유명 음식점에 단원 수만큼의 불고기를 주문해놨다. 그런데 웬걸,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고기가 떨어졌단다. ‘발레리나가 얼마나 먹을까’ 싶어서 1인분씩만 준비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국립발레단 후원자가 단원들을 얕잡아(?) 보고 고기를 샀다가 엄청 먹는 바람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계산을 치른 사례도 있었다. 당시 기획자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였던 볼쇼이발레 공연은 그렇게 성공리에 끝나고, 삼성전자에서 선심을 쓴 소형 TV를 한 대씩 안겨 다시 전세기로 그들을 배웅하였다. 우리는 회사의 포상으로 40여 명의 직원이 속초로 주말여행을 가기도 했다. 담당자였던 나도 물론 회사의 표창을 받았다.

1차 공연 때의 우호 분위기에 힘입어 2년 후인 1992년 5월에는 볼쇼이의 2차 내한 공연이 있었다. 그런데 레퍼토리에 관한 한 2년 전의 첫 공연 때보다 더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바로 볼쇼이의 간판 레퍼토리인 『스파르타쿠스』와 『로미오와 줄리엣』 때문이었다. 특히 로마제국 최대의 노예봉기를 다룬 『스파르타쿠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커크 더글라스, 로렌스 올리비에, 진 시몬스 주연의 영화(1960)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볼쇼이 특유의 남성 발레의 역동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면서 “상류계급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온 클래식발레에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 작품(한겨레신문)”이다. 하차투리안의 발레음악을 재안무 해 1968년 초연한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이 작품으로 레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차 때와 같은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은 1차 때에 못지않은 티켓 판매율을 기록하면서 ‘역시 볼쇼이, 역시 스파르타쿠스’라는 명성을 입증했다.

2차 내한 공연은 소련의 붕괴 후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인들의 면모를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연습과 공연 사이에 틈틈이 이태원 등을 드나들며 열심히 무엇인가 사 모았다. 옷가지며 생활 필수품, 심지어 자동차 윈도우 브러셔와 범퍼까지도. 그러다가 그만 사고가 터져버렸다. 귀국 비행기(2차 때는 러시아 국적기인 아에로플로트)에 모두 타고 보니 올 때보다 무려 5톤의 화물이 늘어난 것이었다. 이미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버린 발레단 측에 초과 화물료를 청구하기 어려워지자 공항측에서는 우리에게 요구를 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물 이유는 없어서 끝까지 버텼다. 결국 비행기는 뜰 수밖에 없었지만 순진했던 나는 행여 도중에 비행기가 추락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까지 했다.

3차 내한 공연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5년 9월이었다. 레퍼토리는 다시 『백조의 호수』와 『돈키호테』였다. 이번에는 서울만이 아니라 부산공연도 가졌다. 부산공연(부산문화회관)의 페파토리는 『백조의 호수』. 물론 서울만큼은 티켓이 팔리지 않아 적자를 기록했지만, 그때 부산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잘 한 결정이라 생각했다. 당시 나는 문화사업부가 아니라 중앙문화센터로 옮겨 근무를 할 때여서, 회사에서는 두 번이나 볼쇼이 공연을 치룬 경험이 있는 나를 부산 공연의 팀장으로 파견하여 공연 진행을 돕도록 했다.
그런데 부산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베테랑 간부들도 경험하지 못한 사고가 터졌다. 볼쇼이 오케스트라 단원 중 바이올린 주자 하나가 호텔에서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오랜 가정불화로 인한 거였다. 나는 공연은 다른 직원들에게 일임하고 이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몰려드는 기자들에게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살임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경찰에 신고하고 검찰의 검시를 거쳐 러시아식 수의에 관까지 챙겨서 모스크바 행 비행기에 시신을 태울 때까지 배운 것도 많았다. 회사에서는 고인과 발레단을 배려하여 1천 달러를 부조금으로 전달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의 1년 6개월 치 급료와 맞먹는 돈이었다.

돌이켜보니 세 번에 걸친 볼쇼이 한국공연에서 연인원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공연들을 직접 봤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KBS가 첫 공연 『백조의 호수』를 녹화 방영까지 했으니 간접적으로 본 인구는 그보다 많을 수도 있다. 첫 공연 직후 지금은 고인이 된 조승미 교수(한양대)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선생, 이제 우리는 발레 못하겠어요. 관객들의 눈을 이렇게 높여 놨으니 어떡해요?” 국립발레단이 볼쇼이와 인연을 맺고 그리가로비치의 『백조의 호수』와 『스파르타쿠스』 버전을 받아들인 것도 이 공연들이 있고 난 후의 일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만난 무용계의 후학들로부터 ‘볼쇼이 한국공연을 보고 나서 무용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들었다. 그때마다 신기한 느낌이 온다. ‘아, 우리가 한국 발레계나 무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 셈이구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기쁨이기도 하고, 부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