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미술기자로 일하면서 잊히지 않는 황당한 사건이 신학철 씨의 그림 「모내기」 재판이었다. 1980년대를 돌아볼 때마다 떠오르는 쓸쓸하고 씁쓸한 풍경 중 하나다. 1987년 제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된 「모내기」는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을 농사꾼의 모내기에 비유해 그린 소박한 풍경화였다. 문제는 이 작품으로 부채를 만든 인천 지역 한 재야청년단체를 수사하던 서울시경 대공과가 엉뚱한 색안경을 끼고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해 갑자기 북을 찬양하는 그림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림 위쪽은 풍요롭고 평화롭게 보이고, 아래쪽은 힘겨운 노동 장면과 미국 쓰레기가 가득하니 이를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북에 동조하는 암시 아니냐는 얘기였다. ‘공안비평’이란 신조어가 나올 법했다.
지난 달 24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제2의 고향 삼은 부여에 유물을 기증하는 기념전 개막식에 갔다가 이 시대의 징표 같은 기록에 얽힌 새 사실을 들었다. 1989년 8월 신학철 씨가 구속되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는데, 당시 재판을 참관한 이들 증언을 들어보면 판사와 화가 간에 오간 대화가 코미디 버금가는 내용이었다. ‘모를 찌는 모습’이라는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는 판사, 소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6촌 형님입니다”라는 화가 대답에 방청석은 떠나가라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다른 재판에 가야했던 박용일 변호사는 이 법정을 떠나지 못해 그날 풀려났어야 할 다른 피고인이 2주 더 감옥살이를 했다는 웃지 못 할 후일담을 남겼다고 한다.
23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백영수 씨 개인전에 갔다가 더 재미있는 회고담을 들었다. 94세 현역 화가로 유명한 백 화백은 40여 년 전 부산 피난 시절에 동료들과 주최했던 제3회 신사실파 전시장에서 일어났던 황당한 기억을 떠올렸다.
1953년 3월 당시 부산 광복동에 있었던 국립박물관에 작품을 걸고 손님들을 맞이하던 백 화백은 기관에서 나왔다는 두 사람이 불만스런 눈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유영국(1916~2002) 그림 앞에 서서 “이것이 무엇이요? 그림의 절반은 갈라져 아래는 푸른색 위에는 흰색인데 그 가운데 그어진 이 선은 북쪽을 의미하는 게 아니요?” 하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해댔다고 한다. 또 장욱진(1917~1990)은 아예 연행되어 가서 심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어이가 없었다. “왜 땅도 소도 빨갛습니까? 사상적으로 좀 이상하지 않소?”
백 화백은 이미 서울에서부터 붉은 색을 많이 쓰면 사상적으로 빨갱이니 뭐니 하는 소문이 돌았고, 빨간색을 많이 쓰면 기관에서 조사를 받는다는 얘기들을 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1953년과 1989년의 상상력이 이토록 흡사한 건 왜일까. 21세기에도 이런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지는 않는지, 머리가 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