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최승희가 교토의 한 무대에서 무대 위에서 춤을 공연하던 도중, 한 일본인 남자가 칼을 들고 무대 위로 뛰어들어 최승희와 관객들을 긴장시켰다. 최승희는 춤을 멈추거나 도망가지 않고 누군가가 붙잡으러 올라올 때까지 남자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춤을 추었다는 전설적 일화가 있다. 남자는 곧 체포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작품이 끝나자 관객들은 그 순간 그 어떤 완벽한 작품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받았으리라 짐작하고도 남는다.1)
결과가 좋아서 관객들이 감동을 받았겠지만, 이처럼 무대와 분위기가 맞지 않는 인물이 중간에 끼어들었을 때의 느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사건은 한쪽에서는 신라시대의 인물이 되어, 또 한편으로는 보험판매 행위를 한 무대에서 벌인 일종의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한 자리에서 맞닥뜨린 사건이자 상징적 퍼포먼스라 하겠다.

무대 위에서나 화면 속의 연기는 설정이며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관객들은 그 순간만큼은 쉽게 속아 넘어간다. 그런 것 보면 인간은 참 단순한, 망각의 동물이 맞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기 때문에 공연문화가 인류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 견디어온 비결이 아닐까? 공연의 재미는 꼭 무대 위의 가상현실체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멋진 장면을 선보인 후 퇴장하는 모습이나 측면에서 자기 순서만을 기다리다가 무대로 출연하는 순간 도플갱어처럼 딴 사람이 되어 등장하는 이중성을 보는 것도 관람의 묘미다. 그래서 VIP석 같이 정중앙 무대가 보이는 좌석도 좋지만, 가림막 뒤까지 보이는 측면이나 공연자의 숨소리나 먼지마저 느낄 수 있는 맨 앞좌석도 나쁘지만은 않다.
춤을 배우던 어린 시절, 작품을 연습하는 단원 누나들에게 신순심 단장은 등장하기 전부터 무대 뒤에서 이미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미소를 짓고 바로 튕겨나갈 포즈를 주문하시던 기억이 난다. 연극은 모르겠지만, 춤의 경우는 춤의 본질이 신명의 표현이다 보니, 이상적인 춤 공연은 무대 뒤에서도 계속되어야 되지 않을지 측면의 다리막 사이에서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있는 무용수들을 볼 때마다 드는 무리한 욕심을 부려본다. 그런 면에서는 프로시니엄 형식의 무대보다는 사면이 열린 마당극의 무대가 어쩌면 더 진정한 공연형식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춤은 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자 만국 공통어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연극은 단순하지만 말의 조합은 음계 몇 가지를 조합해서 다양한 선율을 만드는 음악처럼 끝이 없기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그 바닥이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춤은 좀 다르다. 기본적으로 말 대신 동작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극보다 춤을 찾는 관객은 특수하고 그 수도 훨씬 적지만, 춤 역시 연극처럼 똑같은 동작이 상황에 따라 다른 언어를 연출하기 때문에 발레처럼 화려하지 않더라도 극에 빠져드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춤의 동작도 모자라 이제 아크로바틱 기술까지 연마해야만 될 정도로 단순동작만으로는 진부함을 느낄 수 있는 춤의 진화는 어디까지가 춤인지를 생각하게 할뿐더러 가상현실이라는 환상이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도 생각하게 만든다.`
이성의 발전, 산업혁명, 과학의 발전 그리고 IT산업의 발전 등은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환상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믿었으니까 이야기가 됐을법한 마법에 걸린 백조,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 인형과의 환상여행을 믿지 않게 됐다. 그러다보니 옛날부터 전수되어 내려오는 러시아발레를 제외하고는 창작 춤들의 소재들은 더 이상 환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현실을 이야기한다. 신무용처럼 전설이나 민속을 표현하며 내용보다는 무대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작품들은 비주류 장르가 되어버렸다. 예술마저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고 무채색으로 변화되면서 예술을 가볍게 감상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현실의 중력도 무겁지만 예술조차 현실의 중력을 가중시킨다. TV의 탄생은 극장의 격을 높여주었으나, 오락거리 구실을 못하면서 극장의 문턱은 높아져갔다.
그나마 클래식음악은 아직도 바로크 음악에서 고전음악이 현대음악보다 더 자주 접하고 연주가 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클래식 음악에 친숙할뿐더러 오히려 현대음악은 아직도 보편화로는 자리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신, 현대음악가들은 현대무용가와의 협업, 알고리즘과 우연성을 이용한 테크놀로지 음악 등으로 생존을 모색해나가고 있다. 음악이 전체 예술장르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접근의 용이성과 더불어 장르의 다양함 때문이다.
하지만 춤의 경우는 다양하지도 못하면서 트렌드에 민감해 음악계처럼 좋아하는 장르를 골라 볼 수 있는 기회가 적다. 전통이라고 수준이 높고 신무용이라고 천박하며, 현대춤이라고 의미심장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깊이를 점차 알아가기 위해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널려있어야 한다.

요즘 사회전반으로 퍼지고 있는 “소통”의 문제는 정치문제에서 시작되었다가 이제는 문화예술에게도 대두되고 있다.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장치를 쓰거나 관객참여 등의 형태로 꾀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관객과의 소통이 될 만 한 춤의 형태나 장르는 신무용이나 댄스드라마 등 엘리트 무용의 관점으로 볼 때는 구식에, 상업적 정도로 여기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러곤 소통을 한다면서 일괄로 모노톤의 작품들만 내놓고 있다. 솔직히 소통을 하려면 눈높이를 내리고 무게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게 예술가들에게는 쉽지가 않는 것이다.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눈의 반경을 멀리보고 당대에서 소통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는 사랑받는 수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당대에는 외면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인정받을 수는 있다.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라 불리는 바흐와 헨델은 교회음악과 귀족들을 우한 음악을 써왔기 때문에 생전에도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예술성을 요지부동의 기준치에 두고 관객과 소통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부분엔가는 소위 말해 ‘세속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천박이라는 것은 오로지 높은 예술가의 눈을 좀 낮추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흐와 헨델을 꼭 속물근성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쩌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안정적인 생활과 예술성이란 두 마리 토끼 사냥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바라는 이상이지만 그다지 편한 발언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본연의 단어는 소통보다는 괴한이 방해를 하려해도 무대 위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최승희와 같은 나르시시즘이다.

점차 시계가 사라지는 이유는 휴대폰의 대중화에 있다. 시간이라는 측정 단위도구와 전화라는 감성전달의 대결에서 전화기가 시계를 삼켜버렸다! 그래서 오늘날의 “트렌드”는 “소통”이 맞다. “통화는 간단히”라는 시간절약의 구호가 퇴색해져 이제는 시와 때와 장소를 구애받지않고 대화가 유성으로, 무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신 이들의 대화 내용은 잦아진 대신에 짧고 간담 명료하게 되었다. 너절하거나 장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는 여기서 오는 오해들이 생기지만, 이모티콘은 이러한 오해를 줄여준다.
소통이 지겹도록 대두되는 이유는 휴대폰의 발달과 함께 모든 생활 형태가 소통을 중심으로 하게끔 변하는데, 생활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계층들이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화보다는 측정의 잣대만 사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말이 많고 장황하나 뭘 보여주진 못한다. 무용수들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트렌드에 민감하고 소통에 민감하다면 우리의 표현법은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가야할지….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나 느낀다는 “스트레스”란 “압박”이란 뜻이며, 압박은 “누르다” 즉 “pressure”란 뜻이다. 우리는 다양한 압박을 가하며 당하고 살고 있다. 지구의 중력마저 버거운 현실에 선택의 폭이 제한된 한국의 관객들은 무대에서조차 무용수들이 추구하는 예술성의 압박만을 감상해야 한다. 몸은 중압감을 느껴도 예술만큼은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끼는 상상력이 필요할 때다.

올해가 벌써 대선 철이다. 뽑을 인물의 선택도 많지 않지만 뜬 구름 잡는 이야기들은 오히려 듣는 이의 어깨와 마음만 더 무겁게 만든다. 그런데 생각들은 정말 거창하다. 이러한 사회를 고발하려는 무용가들은 이들을 패러디하는 일 외에는 답습은 삼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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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간에는 연정을 이기지 못한 충동적 사건이었다고 하지만, 이 남자는 일본인 생명보험 외판원으로서, 연정 때문에 벌인 “무리심중(無理心中)”과 보험판매 행위가 복합된 것이라고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 당시의 상황을 해명했다. 체포된 남자를 최승희는 석방시켜주었고, 몇 천원의 보험을 들어주기도 했고 동경공연 때 나고야로 일부러 내려가 만나봤다고 한다. <事實(사실)은 이러하다 崔承一氏談> 1937. 6. 15. 동아일보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