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트립틱 혹은 트립티치는 성화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가운데에 네모난 참나무 판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 날개처럼 붙어 있는 패널들은 완벽하게 가운데의 패널을 향해 뚜껑처럼 덥힌다.
히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정원」의 겉면은 성경의 천지창조를 회색 톤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것은 안쪽 3개의 패널의 그림 속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그 안쪽 3개의 면은, 연대기 순으로, 왼쪽부터 신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는 장면, 가운데 패널은 파노라마 식의 연속적인 이미지로 거기에는 성(性)적인 뉘앙스가 담긴 다양한 포즈의 나체들과 환상적이고 기괴한 형태의 동물들, 거대한 크기의 과일 그리고 알 수 없는 형태의 바위 구조물들이 뒤섞여 나열되어 있고, 그리고 마지막 오른 쪽 패널은 지옥의 장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가 구입한 카피본은 아직도 표구하지 못한 채 방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지만, 언젠가 그것을 근사하게 표구하여 감상할 날을 그리며 가끔씩 꺼내어 보곤 한다.
인연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에서 두 번째로 보슈의 「쾌락의 정원」을 접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무용의 ‘그로테스크’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면서 보슈의 「쾌락의 정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막연히 그 그림과 무용과의 연관성을 떠올렸던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나는 반가운 마음에 교수님의 설명을 더욱 귀담아 들었다. 그로 인해 그 스태그 힐을 향한 나의 애착은 더욱 커졌다.
어느새 시간은 빨리도 흘러 이내 기말고사가 닥쳤고, 내가 수강한 장소특정무용(Site-Specific Dance) 과목도 작품발표와 글쓰기로 기말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장소특정무용이라는 과목 특성상 수업시간마다 교수님과 수강생이 함께 캠퍼스 안을 돌며 공간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연을 펼치는 시간을 가졌었다. 수업 중에 봐 두었던 꽤 매력적인 여러 후보지를 포기하고, 나는 일찍이 점지해 놓은 나만의 장소를 기말고사 공연 장소로 택하였다. 모두가 아는 곳이었지만, 다행히 그 곳을 택한 이가 나 이외엔 없었다. 내가 그 장소를 고집한 이유는 초반에 그 곳에서 느꼈던 아름다운 장소에 대한 감상적인 예찬만을 위함이 아니었다. 유학생활중의 짧았던 신앙생활 동안 느꼈던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짤막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곧바로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때 마침 봄과 초여름의 경계로 우기에서 햇빛이 많이 드는 온화한 날씨로 접어들고 있었다. 날씨의 조건에 따라 장소 특정무용의 작업환경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봄에서 초여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따스한 날씨는 야외 장소를 택한 나에겐 크나 큰 축복이었다. 극장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리허설을 할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스태그 힐, 그 언덕의 바람은 만만치가 않았다. 6미터에 이르는 빨간 천을 이용해 그림 속 갖가지 이미지 들을 차용해 여러 가지 형상을 천천히 연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담아내려 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이리 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변덕스럽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진행이 수월치가 않았다. 첫 부분, 언덕아래 풀숲에서부터 성당외관 복도에 이르기까지 천을 덮어 쓰고 기어 올라가야 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천이 내 몸에 고정되지가 않고 자꾸만 흘러 내렸고, 천을 둘러쓴 덕분에 앞을 보지 못해 방향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인간과 자연이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면 무리일까, 당시를 떠올리자면 나의 상황은 그러하였다.
늘 실내 무용실과 극장의 무대에서 공연준비를 해왔던 터라, 예상치 못한 자연의 반격에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유학생활 중 내 주변인은 모두가 학생들이었고, 그 기간은 모두에게 시험기간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작업을 모니터 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나의 첫 중간점검 평가는 모두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너무도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공간을 사랑했고 그 공간의 의미를 잘 표현할 것만 같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그 곳 성지는, 실제 연습을 할 때면 순간 세찬 바람과 거칠고 차가운 돌바닥, 그리고 따가운 덤불이 가득한 야생의 황무지처럼 변했다. 이제 나는 애초에 계획했던 작품의 의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장소의 야만성을 정복해 보고픈 욕구가 생겼다. 그 이후 나는 비가 오거나 어두워지거나 하는 것에 상관없이, 또 그 곳을 지나는 어린 불량배들이 동양인이 벌이는 퍼포먼스에 야유를 보내와도, 성당 관계자들의 경계하는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연습에 매달렸다. 어느 날은 풀밭에서 천을 둘러쓰고 리허설을 대기하고 있는데, 개를 끌고 그 곳을 지나던 한 청년이 내게 다가와, 이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이상한 옷을 입고 뭐 하는 중이냐며 묘한 표정을 짓더니, 개 오줌을 야무지게 누이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그에게 ‘너는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이 도전의 의미를 아느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개 오줌냄새를 무시한 채 나는 나의 작업 속으로 들어갔다.
평소에 완만해 보였던 그 언덕은 공연을 위해 오르고 있는 그 순간 내겐 완만하지가 않았고 고행 끝에 다다른 성당은 인간이 다가가지 못할 성채 그 자체였다. 나는 마을의 풍경을 배경으로 보슈의 「쾌락의 정원」이 말하는 이야기의 연대기 순서대로 왼쪽 프레임에서부터 오른쪽 프레임으로 옮겨 가며 그림 속의 이야기를 현실의 세계에서 전개해 나아갔다. 때론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되기도 하고, 속세의 탐욕을 드러내는 방탕한 인간이 되어도 보고, 교회와 신을 향해 의미심장한 조롱의 몸짓을 던져보기도 하고, 최후에는 인간이 저지른 죄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움직이는 벽화처럼 차례대로 형상화냈다.
그러는 동안, 이 모든 부조화스럽던 환경이 작품에 필요한 이상적인 소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돌바닥과 거친 덤불숲도 바람 부는 언덕도 어느새 작품에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 장치와 소품이 되어 있었다. 비록 음악도 해설도 조명과 커튼도 없는 야외에서 벌인 ‘1인 출연, 1인 제작 공연물’이었지만, 주변의 자연의 경관들이 제각각 조화를 이루어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장치 보다 더 훌륭하게 현재의 그리고 영속의 또 하나의 “쾌락의 정원”을 이루고 있었다. 정오를 넘어 오후 2시30분의 햇살은 눈부시다 못해 주변을 온통 황금빛의 진공상태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간과 숨조차도 멈춰 버린 진공의 공간에서 나와 스태그 힐 그리고 관객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소 무모하다 못해 도발적인 주제였던 나의 기말고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끝내 내가 품었던 복잡한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가톨릭 신자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숱한 리허설 중 실제 온 몸으로 부딪히고 긁히며 바람과 싸우며 체험해야만 했던 모든 과정들이 곧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 무모한 도전과 투정은 높은 점수로 화답이 왔고, 나와 나의 친구의 두 작품이 선발되어 학교 무용행사의 오프닝 공연에 초청되는 영광을 안았다. 물론 바쁜 학기 일정 중에 시간을 할애 하여 또 월드컵 시즌 중에 모든 유혹을 뿌리친 채 고독한 작업을 위해 바람 부는 언덕을 또 올라야 하는 고충도 있었지만, 나는 나를 인정해 준 교수님들께 또 나를 그 곳으로 이끈 어떤 존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과정을 즐겼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시간은 누군가가 내게 준 자비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공연은 풀밭에 숨겨진 따끈한 강아지 배설물을 밟으며 마무리 했다. 그 감촉, 썩 나쁘지 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