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직업 덕에 흔히 여행이라 부르는 것과는 다른 여정을 다양하게 누렸다. 10여 년 전 갔던 평양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곳이다. 평양 근교 고구려 무덤벽화 여러 곳을 취재하며 정작 흥겨웠던 건 벽돌로 쌓아올린 문이 개봉되기를 기다리며 무덤 밖에 앉아 어울렸던 북쪽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을 풀어놓고 구수한 만담으로 주거니 받거니 한나절이 훌쩍 갔다. 묵었던 숙박시설의 봉투를 챙겨 타국에서 쓰던 화폐와 지도와 기타 기억을 되살려줄 만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습관이 있는데, 평양 기행의 봉투 속에는 그때 챙긴 물티슈와 후식용 사탕까지 들어있다.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대동강 풍광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괜히 숙연해지던 마음 풍경도 떠오른다.
그런데, 아침에 한강을 산책하다가 저녁에는 대동강을 주유하는 인물을 만났다. 별명이 “평양을 맘대로 드나드는 사나이”다. 북쪽에 형님 아우 하는 인사들이 많다니,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절로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의 명함엔 “조선미술협회 회장”이라 박혀있다. 1988년부터 북한을 방문하기 70여 회. 신동훈(64)씨 머릿속엔 남과 북을 미술로 잇기 위한 자료가 한라산과 백두산만큼 쌓여있다.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신 회장은 이런저런 사업 끝에 북한미술전문 화랑을 내면서 북한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미국 비자와 달러가 힘이었다. 북한 미술인들의 총본산이라 할 만수대 창작사를 제 집 드나들 듯 하며 조선미술가동맹 간부들과 화가들을 사귀었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효원 정창모(1931~2010) 선생은 아버지처럼 모셨다.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던 선우영(1946~2009) 화백과는 혈육 저리가랄 끈끈한 정을 나눴다.
요즘 신 회장은 목숨처럼 모은 이 두 화가의 그림을 비롯해 20여 년 수집한 북쪽 그림인 북화(北畵)를 어떻게 할까 고민이다. 그는 북화를 “전통에 독창적인 색깔을 입힌 또 하나의 우리 그림”이라고 정의한다. 북화는 남쪽 그림인 남화(南畵)에 비해 발색(發色)이 강하고 붓의 기운이 거칠며 힘이 넘치는데 험난한 세월과 싸우며 시련을 극복해온 북의 역사가 그림에 스며들어 그렇다고 설명한다. 세계미술시장에서 북화는 인기 품목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라지면서 정치화(주제화)와 선전화를 생산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과 중국 미술애호가중 이 분야를 집중 수집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까닭이다.
신 회장도 최근 몇몇 중국인 화상으로부터 소장품을 일괄 사들이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거절했다. 북화가 한반도의 것이니 우리가 보존함이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 북화 전문 미술관을 마련해 상설 전시를 하는 게 꿈이다. 전시관이 세워지면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이 일에 관심 있는 단체나 개인은 언제든지 연락(shin donghoongallery@gmail.com)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부탁한다. 한민족의 미술 역사는 남화와 북화가 어우러져야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쪽만 가지고는 반쪽 미술사라고 아쉬워한다. 정전 60년을 맞는 2013년, 그의 희망이 빛을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