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통섭의 시대, 공연예술계에서도 장르간의 경계 허물기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통섭인지, 경계 해체와 소통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안애순 무용단의 『S는 P다』는 타 장르와의 협업이 돈독해 보이는 작품이다. 신체와 텍스트, 음악, 오브제 등의 긴밀한 관계 맺음이 작품의 현학성과 놀이성을 적절히 융화시키고, 모호한 기호들을 강렬한 비트와 유연한 신체로 리드미컬하게 풀어놓는다.
『S는 P다』는 언어를 매개로 벌이는 놀이이자, 세상에 대한 거시적 통찰이다. S에 넣을 수 있는 것과 P에 넣을 수 있는 것, S와 P의 자리를 비워두고 관객의 유희를 유도하는데, 이는 언어를 통한 자잘한 소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근원을 파고드는 꿈틀거림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언어의 생성과 변화란 곧 인류의 탄생과 질곡의 역사인 셈이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장은 언어의 탄생, 곧 자연 속에서 인류와 언어가 생성되며 동일시되는 과정이다. 무대 배경에는 라파엘로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이 걸려있다. 푸른 색 잔디가 깔린 무대는 자연을 연상시킨다. 무용수들은 인간의 첫 발화의 모습을 소리와 몸짓으로 표현하는데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하다. 킁킁대며 서로의 몸과 몸이 소통한다. 욕망을 배우기 이전의 몸이다. 학습된 욕구가 아닌 원초적인 욕구의 표현이다. 모방하고 체화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소리 지르고 구르고, 마임에 가까운 표현들이 관객을 다소 불편하게 한다. 그들에게 모방은 존재론적 닮기다. 보고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언어를 느끼고 그 본질을 받아들인다. 난해한 작업이다. 구체적인 표현들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상징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몸의 뒤엉킴으로 표현되는 장면들, 무용수들의 몸은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는다. 기교를 감추지 않는다. 신체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통제가 이루어지는, 자유와 통제의 조절이 유연하다. 극의 초반부에 다소 어색해 보였던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워졌다. 설명적인 몸짓으로 그칠 뻔 했던 위험성을 무리 없이 극복해 냈다.
인간의 욕망이 생겨나면서 언어가 뒤틀린다. 질곡의 시간이 시작된다. 두 번째 장은 언어와 몸이 직조된 듯한 기하학적인 표현들을 보여준다. 언어가 사회를 이룬다. 숨이 막히게 돌아가는 세상 속 규칙들안에서 인간은 장난감 가게의 태엽감긴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돌아간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작동되는 것이다. 멜로디는 거의 없는 음향에 가까운 음악이 매혹적으로 박자를 맞춘다. 물방울 음악은 놀이성을 잘 살렸다. 이로써 난해한 텍스트가 신체를 통해 전달된 모습은 의외로 경쾌하다. 첫 장에서는 인간의 삶의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몸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두 번째 장은 동작에 각이 있음에도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오히려 첫 장보다 더 유연해 보였다. 무용수들이 비트를 타면서 작품 속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배경의 자막에서는 언어가 만들어낸 수많은 규범들이 인간을 질책한다.
세 번째 장에 이르러 언어는 침묵한다. 논리적 장치의 해체, 논리적 언어로서 설명이 불가해한 세상이 펼쳐진다. 가짜 욕망과 진짜 욕망이 혼재한다. 세상의 소음들, 수많은 단어들, 그것들이 겹치고 부딪히면서 깨친다. 조각이 나고 가루가 되고, 소음은 곧 침묵이 된다.
날카롭고 강렬한 금속성의 음악이 사이버시대의 느낌을 잘 드러냈다. 시물라크르의 세계, 복제와 이종교배, 혼합과 혼융의 하이브리드 세상이다.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인 괴생명체가 무대를 오간다. 그런데 나신으로 나올법한 여인의 비키니 차림은 넌센스다.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하면서 오독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대의 전면 배경은 아주 적절히 변화를 주며 활용되었다. 그림과 금속성 물질, 그리고 영사막, 자막 등. 무대는 현대예술의 집결지였다.

S와 P의 빈칸을 선택하여 그들의 연결 관계를 찾아보도록 관객의 참여를 유도했지만 관객을 위한 여백은 난해하기만 하다. 새로운 무용언어를 찾고자 하는 이 작품의 열망은 다양한 장르의 융합만을 꾀한 것이 아니라 현대철학의 난해한 개념들을 다소 벅차게 수용했다. 무용의 저변화와 대중화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기획 단계의 의지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그램 북의 해설을 통해 몇 개의 매듭만 풀어주었어도 좋았으리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관객은 다소 불친절하면서 시니컬한 이 무대에 매료된 듯하다. 차가운 무대, 냉소적인 리듬은 상실과 소외의 느낌을 주지만 그 허전함 뒤에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훈기가 느껴지게 한다. 언어 밖의 세계, 더 이상 언어로서 설명할 수 없는 그 밖의 세상은 자유가 아닌 또 다른 염원과 갈망이 존재하는 곳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