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이탈리아어로 “작품”이라는 뜻의 오페라는 노래의 멜로디로 각각의 등장인물의 심리와 성부에 따라 성격을 표현하는 극이라는 점에서 대사의 내용을 듣고 유추해내는 연극과는 달리,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장르다. 영어로 “음악적”이라는 뜻의 뮤지컬을 통해 노래극이 좀 더 가벼워지고 대중적이 돼버렸지만, 그 이전에는 오페라가 한때 귀족에서부터 서민까지의 대중적인 여흥꺼리이었던 점을 이용하여 의식 있는 작곡가들은 작품을 통해 세상과 주관객인 귀족들을 풍자하기도 했다.
특히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경우는 아름다운 선율 속에 「나부코」, 「리골레토」, 「아이다」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타락한 권력자들을 고발하며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드러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영화 「반지의 제왕」를 통해 널리 알려진 북유럽의 신화를 토대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으며 ‘백조대왕’ 루드비히 2세의 비호 아래 작품을 완성했으니 그 내용이 방대하고 장중했으나 대중성 있는 작품들은 아닌 것이다. 오죽하면 니체가 바그너의 오페라에 염증을 느끼던 차 조르쥬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는 크게 기뻐했다고 했을까.
쟈코모 푸치니의 경우, 아름다운 선율 속에 피어나는 사랑이야기 끝에 이어지는 여자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관현악적으로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통속적“이라고 쉽게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국에 대한 호기심과 이를 어필할 만한 관현악적 기법은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 미국 심지어 일본과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남겨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이국적인 오페라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데,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나비부인」으로 대표되던, 동양이라는 나라의 수동적인 여성상으로 치부한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강하고 차가우면서도 화려함과 다이내믹한 요소를 가미한 또 다른 동양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최후 작품이자 미완으로 남겨졌기 때문에 그의 제자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을 시킨 부분을 현대 작곡가의 새로운 곡으로 대체하거나, 연출가에 따라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기존의 결말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결말로 연출할 수 있는 창의력의 여백을 제공하기도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2013년, 영국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는 쟈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 DVD를 발매했다. 루마니아 출신의 안드레이 세르반의 연출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축전으로 올린 버전을 30년 만에 리바이벌 시킨 공연 실황이다. 초연 때는 투란도트에 구에네스 존스, 칼라프 왕자에 플라시도 도밍고가 맡았다. 게다가 이 프로덕션은 동아일보 창간 66주년과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문화축전의 일환으로 초청된 로열오페라단이 1986년 9월9일에서 1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카르멘」과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올렸던 버전이기도 해서 남다른 감회가 깊다. 내한공연에서 투란도트는 올리비아 스태프, 칼라프 왕자는 프랑코 보니솔리가 맡았다.
그 당시 나는 중학생의 신분으로 서울예술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던 차였다. 고액의 입장권 때문에 아버지에게 어렵사리 타낸 돈으로 「카르멘」과 함께 3층 관람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삼손과 데릴라」도 아니, 5일 내내 공연을 보고 싶었으나 이미 서울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큰 누나마저 시큰둥하게 「카르멘」 한 회만 구입한 마당에 오페라가 ‘종합예술’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성악’으로만 간주하던 분위기의 시대에서 성악도 전공하지 않는 내가 뭐라고 전부 관람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겐 가장 낯선 「삼손과 데릴라」는 포기한 일이 생각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동서의 연출가들에 의한 수많은 무대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안드레이 세르반의 연출을 높이 사는 이유는 중국의 특징을 디테일과 간결함으로 적절히 배합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중국 왕족 복식과 머리장식 때문에 가수들의 동선의 제약을 받는 기존의 연출과는 달리 굉장히 동적이지만, 그 간결함 때문에 국적이 모호한 부분도 있다. 「투란도트」와 같은 그랜드 오페라는 화려하지만 그만큼 대거 동원되는 코러스의 인원 때문에 무대의 역동성이 둔해질 수밖에 없다. 코러스들이 춤과 연기까지 담당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몸놀림이 둔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무대가 산만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출가들은 큰 무대의 공간을 최대로 채우기에만 신경 쓴 느낌이다. 하지만 로열오페라단이 상주해있는 코벤트가든 오페라하우스는 생각보다 무대가 작다. 작은 공간에서 큰 무대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3층 규모의 발코니를 설치해서 코러스를 배치함으로써 안정적이면서도 압도적인 무대를 만든 연출가의 의도를 무대만 봐도 알 듯하다, 이로 인해 무대는 주역가수들에게 집중하도록 연출되었으며 나머지 여백은 무용수들과 이동식 오브제가 차지해 역동감을 주었다.
처음 접한 「투란도트」는 아름다운 서양적 선율과 함께 동양인이 들어도 특이하고도 다채로운 음색을 연출해 관람 내내 신비로움을 선사했다. 푸치니는 천재적 작곡가이자 편곡의 귀재라고 할 만큼 기본적 멜로디를 극대화시킬만한 풍성하고 다채로운 관현악 기법을 활용했다. 그는 생전에 중국을 방문해본 적은 없었지만, 선물로 받은 뮤직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모리화」같은 중국의 선율을 「투란도트」에 그대로 반영했다고 한다. 오페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종, 오르간, 첼레스타, 글로켄슈필 등을 사용하며, 음향효과를 위해 알토 색소폰, 우드블록, 탐탐, 공 등을 무대 뒤에서도 연주 하게끔 다채로운 관현악 편성을 구사했는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을 주요 참고하여 「투란도트」를 작곡했다고 한다.
예전에도 언급1)했지만,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중국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 「투란도테」를 오페라화한 것인데, 그 안에는 푸치니의 슬픈 가정사가 투영되어있다. 「투란도트」에 대해서 오랫동안 관심을 갖다보니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얼음불꽃‘으로 표현하는 투란도트 공주는 그리스의 스핑크스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과언이 아닌 것은, 투란도트 공주의 신분과 심성 때문이다. 상반신은 여자인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스핑크스가 이집트에서는 왕권의 상징이자 수호자를 뜻한다면 그리스의 것은 사악함의 상징이었다. 그리스어로는 목을 졸라 죽이는 ‘교살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미소년을 범한 것을 벌하기 위해 헤라가 보낸 괴물로 테베 땅을 황폐하게 하고 테베로 들어가는 길목에 지키고 있다가 수수께끼를 내어 맞추지 못하는 행인들을 죽이는 괴물이지만 오이디푸스가 그 수수께끼를 풀자 수치심으로 그 자리에서 자살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투란도트 공주는 이 두 나라의 스핑크스가 상징하는 왕권 그리고 사악함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녀에게 반한 또 다른 주인공인 전 타타르 왕국의 왕자 칼라프와 그녀의 관계는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와의 관계와 많이 닮아있다. 단지 칼라프 왕자와 타타르 왕국에서 쫓겨난 그의 아버지 티무르왕의 사이가 좋은 것과, 「투란도트」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라를 전쟁에서 빼앗기고 몸종인 류와 떠도는 신세가 된 모습은 어딘지 말년에 딸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눈 먼 오이디푸스왕과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투란도트」를 자세히 보다보면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재조합 같다는 생각이 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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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월간춤」 6월호 춤산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