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 갑니다

가수 김상희가 부른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은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던 국민가요였지요. 물론 가을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이기도 했고요. 시월입니다. 하늘은 더 이상 시릴 수 없을 만큼 푸르고 만산의 홍엽은 더 이상 아릴 수 없을 만큼 붉으니 가을이 마침내 절정에 다달은 시월의 중순입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으면 코스모스 꽃잎 하나에 이름 하나, 꽃잎 하나에 시 한 수 적어 날리고 싶어지곤 합니다. 코스모스 꽃잎 편지를 띄워 보내면 어떤 꽃잎은 수취인 불명으로, 어떤 꽃잎은 주소불명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또 어떤 꽃잎은 백만 년쯤 지나 그대에게 도착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때 우주를 건너와 나와 함께 보냈던 어떤 가을을 생각하며 그대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싶어지곤 합니다.

曲馬團이 / 걷어간
허전한 / 자리는
코스모스의 / 地域

코스모스 /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 緯度

참으로 /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 一生

코스모스 /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 指紋
- 박용래, 「코스모스」 전문

먼 남쪽 바다, 애월에 살던 계집아이가 있었습니다. 애월이라는 지명을 처음 알게 해주었던 그 소녀는 이제는 가고 없습니다. 사랑이라 주고받은 오늘의 편지들이 사실은 소꿉장난이라던, 먼 훗날 기억마저 희미해질 먼 훗날, 우연히라도 떠올리게 된다면 열여섯 살 계집아이와 열일곱 살 사내아이의 그저 풋풋한 소꿉장난이었음을 알게 될 거라던, 먼 훗날 어느 가을 호젓한 오솔길을 홀로 걸을 때 혹여 코스모스 피었거든, 그 붉은 잎에 박용래의 「코스모스」 한 구절 적어 바람에 날려보내주면 그것으로 좋겠다던, 자기가 진정 사랑한 것은 박용래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라 했던, 스무 살 그 꽃 같은 나이로 스스로 세상을 등진, 그 아이의 지문이 가끔 살아오는 가을이 있습니다. 그 소녀는 애월에 살았더랬습니다.

애월(涯月)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 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 서안나, 「애월 혹은」 전문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아이를 다시 떠올린 건, 지워졌던 기억들이 떠오른 건, 서안나의 시, 「애월 혹은」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녀가 내게 보냈던 문장들, 어금니같이 아려 오던 검은 문장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소녀에게 어쩌면 세상은 혼돈, 카오스(chaos)였을지 모릅니다. 그 소녀가 애월의 절벽에서 뛰어내린 건 죽음이 아니라 어쩌면 코스모스(cosmos)로 가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애월에 닿거든 그리하여 그곳에 코스모스 피었거든 오늘의 이 이야기를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차운 계절을 제 스스로의 피로써
애닯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方向 없는 그리움으로 발돋움하고
다시 鶴처럼 슬픈 모가지를 빼고 있다.

붉은 心臟을 뽑아 머리에 이고
가녀린 손길을 젓고 있다.
- 조지훈, 「코스모스」 전문

방향 없는 그리움으로 핀 꽃. 학처럼 슬픈 모가지를 하고, 붉은 심장을 뽑아 머리에 이고 있는 가녀린 꽃. 코스모스가 피는 가을이면 애월이 떠오르는 까닭입니다. 수취인 불명이 되어 되돌아오겠지만, 그래도 가을 바람에 코스모스 꽃잎 편지를 띄워보내고 싶어진다면 당신 안에도 어떤 소녀가 있다는 뜻일 테지요.
코스모스는 뜻밖에도 국화과의 꽃입니다. 여덟 개의 얇은 잎으로 국화라니요.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국화가 되다만 꽃이겠다 싶습니다. 조금은 모자란 꽃이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코스모스랍니다. 우주랍니다. 질서랍니다. 우주라니요. 질서라니요. 그 까닭을 이규리 시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몸이 가느다란 것은 어디에 마음을 숨기나
실핏줄 같은 이파리로
아무리 작게 웃어도 들키고 만다

오장육부가 꽃이라,
기척만 내도 온 체중이 흔들리는
저 가문의 내력은 허약하지만

잘 보라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도
똑같은 동작은 한 번도 되풀이 않는다

코스모스의 중심은 흔들림이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중심,
중심이 없었으면 그 역시 몰랐을 흔들림,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마른 체형이
저보다 더 무거운 걸 숨기고 있다
- 이규리, 「코스모스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전문

이해되시나요. 왜 코스모스가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이 우주가 그러하지요. 이 우주의 질서가 또한 그러하지요. ‘우주의 중심은 흔들림’이라는 시인의 통찰.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중심과 중심이 없었으면 그 역시 몰랐을 흔들림’이라는 예리한 통찰. 아닌가요? 그러고 보면 코스모스의 꽃잎이 왜 여덟 개인지 알겠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팔정도(八正道 ;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念, 正精進, 正定)가 그렇고, 주역의 팔괘(八卦 ; 一乾天, 二坤地, 三震雷, 四巽風, 五坎水, 六離火, 七艮山, 八兌澤)도 그렇고… 여덟 개의 꽃잎이 그냥 여덟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대흠의 시를 한 편 더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된다
저렇게 저마다 꽃을 피워 내면서도
꽃들은 다른 꽃을 다치게 하는 법이 없다
꽃 피운다는 게 누군가를 밟고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꽃들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길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더불어 잎도 줄기도
기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때쯤 하늘은 한 뼘 더 높아진다
제 그늘은 한사코 간직하면서
꽃은 그늘 아래 움츠리지 않는다
- 이대흠,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전문

세상살이의 이치, 모듬살이의 이치를 코스모스가 가르쳐주는 계절. 가을이 깊습니다. 흔들리면서 기쁘게 흔들리면서 기꺼이 꽃을 피우는 꽃. 우리 모두 코스모스처럼 꽃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