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잊을 수 없는 나의 공연들’ 세 번째 이야기는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공연 하나만의 추억은 아니다. 근래 국립극장의 ‘레퍼토리시즌제’ 때문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공연시즌제’라는 시스템을 일찍이 도입하면서 다른 공연들과 함께 성과를 올렸던 경우로 개별 공연의 기억과는 조금 다르다.
2003년 2월 초. 나는 생애 두 번째 직장인 부천문화재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1년 전부터 손경년 정책실장(현재 대표이사 대행)의 권유가 있던 터이기도 했다. 1998년 초에 첫 직장인 중앙일보를 떠나 근 5년 동안 석사 졸업과 박사 과정을 막 마치고 난 후였다. 거기서 내게 주어진 직책은 총 세 군데로 분산된 다섯 개의 크고 작은 극장 운영과 공연관련 마케팅, 자료실 운영 등을 총괄하는 전문위원이었다. 그해에 거기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연 시즌프로그래밍 방식을 도입했다. 석사 논문은 “미국 극장중심의 관객개발 시스템과 이의 국내 도입 연구”였다. 석사과정에서 접하게 된 미국의 시즌공연 방식과 관객개발을 위한 예술교육의 취지와 도입과정, 성과 등에 매료된 결과였다. 그 방식을 우리 현장에 적용하고 싶다는 열망도 생겼다. 그리고 이 방식은 내가 몸담았던 민간극장인 호암아트홀보다는 비영리 공공극장에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기회는 5년이나 지나서 온 것이었다.
가자마자 시즌방식 도입을 위한 여건을 판단하기 위해 예산 등을 파악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부천문화재단의 공연예산은 당시 3억 원. 비슷한 시기 대전예술의전당이 20억원, 성남아트센터와 고양문화재단이 대략 60억 원 수준에서 시작한 데 비하면 코끼리 비스켓이었다. 그렇지만 열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직원들을 모아놓고 취지를 설명하고 의견을 들었다. 온 지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직원들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들도 주먹구구가 아닌 어떤 시스템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공연시장 형편으로는 작품 수급이 만만치 않고, 경험도 없으니 1년짜리 풀시즌 보다는 우선 반년씩 나누어 봄과 가을시즌으로 시작해보자고 했다. 그해는 봄, 여름에 준비하여 가을시즌부터 가기로 의기투합을 한 후 성수열 상임이사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이해를 해줄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런데 취지를 듣더니 그가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단기간에 이 방식이 정착을 하게 된 것도 그의 믿음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네방네 자랑도 하고 다녔다. 이렇게 해서 그해 가을 시즌 공연은 음악, 무용, 연극 등을 고루 포함한 17개의 공연으로 조촐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수도권의 어느 극장장이 ‘용감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현대무용, 진지한 연극들도 고르게 배치하였다. 이런 공연들은 특히 지역에서 관객을 모으기가 어렵다.

시즌 개막공연으로는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밀었다. 개막작은 시즌을 대표하는 공연이자 이를 집중적으로 밀어서, 즉 여기에 홍보의 포커스를 두어서 매진을 시키게 되면 그 긍정적인 기운이 다음 작품들로 이어지게 하는 일종의 전략적 배치다. 그리고 힘이 빠질 만하면 다시 강한 작품을 중간 중간에 끼워서 그런 힘이 시즌 내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의 유리그리가로비치 버전으로 내가 중앙일보 시절에 세 번이나 초청했던 그 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의 제휴가 성사된 결과이기도 해서 흐뭇했다. 게다가 주인공인 오데트(백조), 오딜(흑조)역에 김주원이 출연하여 부천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 후 김주원과는 신기하게도 내가 안양으로, 대전으로 가는 데마다 공연이 성사되는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우리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중앙지 기자간담회부터 시작하여 지역기자 간담회, 통합 브러셔와 포스터 배포, 패키지 판매, 계속되는 홍보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지역 매체들이 약한 탓에 자체 미디어도 확보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재단 자체 홍보용 잡지를 따로 창간하여 공연 홍보는 물론 교육적 차원에서 다양한 읽을거리를 배치하여 시민들이 흥미를 갖도록 했다. 복사골문화센터 건물 전면에 초대형 현수막도 걸고 거기에 시즌 전 작품이 한눈에 보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개막작 『백조의 호수』를 시작으로 매진되는 공연들이 여럿 나왔고 상대적으로 부진한 공연들에만 남은 역량을 집중하게 되니 힘을 효율적으로 안배하는 효과도 있었다.
특히 부천시민회관(1248석)에서 『백조의 호수』 2회 전석 매진은 전년도에 같은 공연 한 번으로 60% 정도 판매를 했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띨만한 성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도 놀랐다. 그러니까 같은 단체의 같은 작품을 같은 극장에서 1년 동안 연이어 했는데 티켓 판매는 600장에서 2,400장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시즌 방식의 힘이, 개막공연 전략의 효과가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시즌 전체 작품의 평균 매표율도 전년도 23.9%에서 46%로 두 배 증가하였다. 이런 추세로 다음 해 봄시즌에서는 69%로 1년만에 꼭 3배의 매표율을 기록하여 다시 놀랐다. 시즌 방식의 프로그래밍과 일괄 공개, 패키지 판매 방식이 부천에서는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이런 빠른 반응은 역시 부천필(예술감독 임헌정)이 오랫동안 닦아 놓은 기반 때문이지도 싶었다. 이렇게 해서 지역 최초의 시즌공연 시스템의 도입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원혜영 시장(현 민주당 국회의원)은 ‘문화도시 부천’을 주요 시책으로 밀고 나갔는데, 어느 날 재단 이사회 자리에서 “부천문화재단의 공연시즌제가 재단뿐만 아니라 문화도시 부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칭찬했다.
부천에서의 성과가 내게는 시즌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후 안양에서도 대전에서도 같은 시스템을 도입하여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게 되고, 덕분에 관객개발에 관한 한 전문가라는 과분한 소리도 듣게 되었다. 부천문화재단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예산으로 시즌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