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

─ 공식적인 데뷔는 언제 어디서 하셨나요? 프로그램은요? 그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실수나 기억나는 점은요?
* 1982년 4월 22~23일 공간사랑에서 했습니다.
3년 반 동안의 프랑스 유학 후에 조동화 님의 소개로 당시 공간사랑 극장장이었던 강준혁 님을 만났는데 보자마자 바로 공간사랑 개관 5주년 기념 초청 공연을 제의하셨습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유학시절에 배운 것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선구자, 계몽자적인 의욕이 충만했던 무대였던 것 같습니다. 솔로를 3작품 연달아 했는데 체력적으로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동안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인 피나 바우쉬(Pina Bausch)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에게서 동시에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미국의 포스트모던 댄스(Post Modern dance) 무용가들의 춤에 대한 혁신적 관점에 매료당했습니다. 그러한 저의 당시 상태를 그대로 세 작품으로 드러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작품은 피나 바우쉬의 『콘탁코프』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봉 쥬르』.
무대 중앙 뒤의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관객 앞으로 걸어 나와 나의 몸이 얼마나 제 기능을 잘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상품가치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반부는 그렇게 대담하게 건강한 치아까지 과시하고는 후반부에는 뒤로 가서 의자 뒤에 숨습니다.
대담한 척하는 내가 사실은 수줍은 겁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나의 춤을 보는 당신들도 마찬가지이지요?’라는 동의도 얻어내고 싶었지요.
음악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는 나에게 모순된 상황을 상기시킵니다. 어린 시절에 강요된 미사 동안에 떠올랐던 온갖 악마적 상념들의 기억, 그래서 성스러운 음악을 들으면 극단적이게 다른 것이 연상되나봅니다. 의상은 일상복,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었어요.
김영태 님은 이 작품에 “우아해지기 위해 태어나기”라는 과찬을 해주셨는데 저는 좀 더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정직하게 망가지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였는데 6년 후 출산을 경험한 좀 더 어른이 된 몸으로 이 작품이 씨앗이 되어 『자화상』으로 발화되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은 『대각선』.
포스트모던 댄스의 지대한 영향이 묻어 있습니다.
솔본느 무용 디쁠롬의 안무시험에 합격한 작품인데요. 무대 왼쪽 뒤에서 오른쪽 앞으로 대각선으로만 진행됩니다.
앉았다가 일어서서 그 방향으로 진행하는 아주 간단한 일상적 행위를 시간성을 달리해서 되풀이 해보았습니다.
아주 느리게, 아주 빠르게, 세 박자의 리듬으로, 규칙을 해체하여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스타카토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평상의 시간성을 가지고 일상적으로 끝납니다. 35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작품입니다. 지금도 안무수업에 재료로 사용도 하는데요.‘ 무엇이든지 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만든 작품입니다. 무 음악, 의상은 검정색 무명 민소매 컴비네이션, 언뜻 무술 복 같기도 해서 내가 동양인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연습과정을 본 미술평론가 이경성 씨가 아주 좋아한 작품이었어요.
마지막 작품이 『계속』.
30분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추는 단련된 체력을 과시하였죠.
커닝햄적인 구조를 만들고 그 공식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음악은 강태환 씨의 「일출」, 의상은 연습복을 입었습니다. 공연 후에 강석희 작곡가님이 그 공식을 다 외우고 있으셔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이렇게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랍네요. 그런데 영상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한 시기여서 그 첫 공연의 영상기록이 없는 것이 아주 후회스럽습니다.

─ 10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춤을 시작하셨나요?
* 어릴 때부터 어른들 앞에서 재롱으로 춤을 곧잘 추었습니다. 초등학교시절에는 학교의 학예회 등의 행사 때 매번 뽑혀서 춤을 추어서 그때 벌써 춤 출 때만은 현실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예감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 수학은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15세에 발레교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용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는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살얼음을 딛듯이 무용을 배웠습니다. 춤추는 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집안 내부에서 먼저 경험하였고 그 편견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저를 더욱 무용으로 집중시켰습니다.
매일 몸을 수련하는 습관은 이 시절에 입력된 것 같습니다.

─ 무용수이자 안무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 그동안 안무한 모든 작품들이 다 특별하지만 솔로로는 『자화상』, 군무로는 『빨래』를 들 수 있습니다.
서양인들의 ‘흉내 내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만들은 이 두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초연부터 지금까지 계속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 작품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무엇인가요?(혹은 시기별로 어떤 주제를 잡으셨나요?)
* 나의 작품은 내가 처한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해왔고 또 그럴 것입니다. 『유희하는 인간』, 『동심에의 회귀』, 『여성주의』, 『한국인』, 『성찰』, 『늙는 신체에 대한 경의』 등으로 바뀌지만 결국 큰 주제는 춤으로 나의 ‘정체성 찾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프랑스로 유학해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요,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이런 활동이 한국현대무용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세요? 당시의 무용계는 어떠했나요?
* 귀국하여 발표한 작품들로 국내무용계의 또 다른 다양성에 일조 하였다고 생각은 합니다.
제가 유학한 당시의 프랑스 무용계는 누벨당스(Nouvelle Danse)의 꽃이 피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 안무가가 작가로서 인정되며 작가적 발상, 독특한 개성, 자유로운 상상력, 실험적 모험을 발휘하는 풍토였고 저도 그 피를 수혈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의 대부분 무용가들이 그렇듯이 귀국하여 너무 빨리 대학교수가 되어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작가적인 치열함을 십분 발휘하지 않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동시에 당시의 한국무용계와 지금의 한국무용계가 외형만 바뀌었고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 펜클럽(한국춤평론가회) 회원으로서 평론활동도 하셨고, 본지 연속수상 기고, 에세이집 발간 등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계시는데, 기억나는 점이나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 글쓰기는 춤추기와 다른 방법으로 나를 단련시키고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나는 상당히 감정적인 편인데 글을 쓸 때는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또 하나의 나를 만납니다. 춤추는 것이 힘들 때 글을 쓰고 글 쓰는 것이 지루할 때 춤을 만드니 꽤 운이 좋은 편입니다. 춤지 연속수상들을 모아 책을 내게 된 것은 부끄럽지만 공연과는 또 다른 나를 드러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초기펜클럽의 아마추어 멤버 시절에 만났던 분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까지 해온대로 앞으로도 춤추고 가르치고 글을 쓰겠지요.

─ 춤계 국제교류의 중요성, 혹은 외국에서의 활동을 위해 필요한(선행되어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 국제교류는 일방적으로 우리 것을 소개하는 수준으로부터 이제 서로 나누고(exchange) 함께 작업하는(collective) 시기로 이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과 다른 춤 개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동등한 사회적 문화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눌 수도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가부장적, 인종차별적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지 않은 다른 나라 무용가들과는 교류가 어렵겠지요.
타민족, 타문화에 관한 이해는 결국 타인에 관한 이해로 귀결되니 국제교류를 하는 무용가들에게 객관적 사고와 이성, 지성이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 창작활동과 안무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세요?
* 창작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누구나 창작을 할 수 있습니다.
안무는 하나의 직업적 선택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요리(『창작』)는 하지만 모두가 요리사(『안무가』)는 아니라는 거죠.
오늘 날의 안무가는 춤꾼이라기보다는 춤 작가 즉 전문 요리사입니다.
춤 작가로서의 안무가는 전문요리사처럼 재료를 알아야 하고 어떻게 얼마나 배합하는지, 불과 만날 때도 끓일지 삶을지 구울지 아니면 아예 생선회처럼 날 것으로 낼지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요리를 먹는 사람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안무는 몸, 신체의 기술, 음악, 드라마, 디자인 등이 함께 조화를 이룬 맛있는 요리이며 공연현장에서 감각적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춤계 후배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안무할 때는 냉철한 머리로, 춤출 때는 뜨거운 가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