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김용걸댄스시어터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10월14~15일 아르코대극장)
길은 지독히도 험하다. 절벽 허리를 간신히 둘러 낸 한 걸음 폭 외길이다. 가시덩굴만 무성하다. 목숨 건 여정을 무수히 삼킨 지옥길이다. 겨우 통과한다 해도 태반이 피투성이다. 도돌이표처럼 그 길이 무대에 펼쳐진다. ‘reflection(리플렉션)’이라는 자막이 뜬다. 피아노 소리가 을씨년스럽다. 소리를 따라 잿빛 투피스에 색안경을 낀 여자가 나타난다. 기숙사 사감같이 딱딱한 매무새다. 기이하고 익살맞은 몸짓이 쓸쓸히 떠도는 음악을 쫓아다니며 지운다. 때론 한 동작을 병적으로 되풀이 한다. 울다 웃다 화내는 표정을 변검처럼 입고 벗는다. 입을 쩍쩍 벌리며 탐욕의 입맛을 다신다.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흉측한 눈빛이 방향지시등처럼 깜박인다. 비극의 안개등이 뒤따라 켜진다.
‘trust(트러스트)’라는 소제목이 조용히 떴다 사라진다.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성직자와 십자가가 영상에 비친다. 카운터테너의 우울한 선율이 우아한 발레 동작을 뱀처럼 차갑게 휘감는다. 무덤같이 음산하다. 자막은 ‘生(생)’인데 영상은 죽음이다. 스크린은 잔혹하게 희생된 동물의 영상을 마구 토해낸다. 바닥에선 짐승 탈을 쓴 무용수들이 애달픈 몸짓으로 한을 뱉어낸다. 머리 위 영상을 위패와 지방 삼아 재를 올리며 자기 족속의 혼령을 위로한다. 한자 ‘愛(애)’가 공중에 애처롭게 나타난다. 화면에 등장한 엄마는 아들이 수없이 100점을 맞아도 만족을 모른다. 끊임없이 다그친다. 아들은 엄마의 욕심만큼 높은 곳을 찾는다. 화면은 ‘쿵’이라고 쓰고 무용수는 ‘악!’이라고 읽는다.
‘friend(프랜드)’. 세 여자가 춤추는데 둘은 앞서고 하나는 처진다. 따돌림을 견디다 못한 학생이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와 영상이 춤과 나란히 흐른다. 몸짓이 격해지자 겹치고 얽힌 뉴스 음향이 해일처럼 객석을 덮친다. ‘이래도 남의 일로만 여길 거냐?’는 듯 악다구니를 쓴다. 이제 춤은 그 삿대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in the dark(인 더 다크)’. 밤이다. 핏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눈을 번뜩이며 등장한다. 드레스 깃 사이로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노리는 탐욕의 속살이 실룩댄다. 춤사위는 관능미와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녀는 짐승 탈을 쓴 무용수들을 이끌고 부린다. 영혼을 빼앗긴 그들의 몸짓은 허허롭다. 달빛을 등진 검은 구름을 타고 탐욕의 음모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女(여)’자가 뜨자 소녀들이 걸어 나온다. 청춘의 응어리가 뭉치고 굳어져 금속의 소녀상이 돼 먼 곳을 응시한다. 물컹한 설움을 억지로 삼키는 소녀의 눈가엔 치욕의 역사가 빗물이 돼 흐른다. 춤은 할머니의 얼굴에 굵은 주름으로 겹겹이 파이고 접힌 한을 느린 동작으로 어루만진다. ‘중립’에선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고 지하철 공사현장이 폭발하고 전동차와 여객선이 불에 탄다. 기자 초년병 시절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현장이다. 공교롭다. 영상은 메마른 눈빛으로 냉정의 돋보기를 들이댔던 그 시절에 나를 불시착시킨다. 목메어 우는 화면 속 유족들이 ‘더운 마음으로 기사를 쓰긴 했냐?’라고 따지며 어깨를 잡아 흔드는 것만 같다.
무용수들은 ‘굿’판을 벌인다. 잠들지 못한 원혼을 춤으로 감싼다. 탈을 벗은 그들의 춤사위는 신명 나면서도 애절하다. 핏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춤은 여전히 화려하고 거만하다. 그녀는 존재와 위엄을 과시하듯 객석을 빤히 쳐다보며 퇴장한다. 나머지 무용수들은 그녀를 따라 짐승의 탈을 다시 뒤집어쓰고는 힘없이 어둠 속으로 되돌아간다. 섬뜩한 결말이다. 그걸로 끝이다. 커튼콜도 없다. 80분간의 공연은 불친절한 침묵과 어정쩡한 박수로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여운의 무게에 가위눌려 선뜻 일어서지 못했다. 눈에 담았던 춤은 흩어지고 머릿속에선 영상과 자막이 서늘한 플래카드가 돼 아우성치듯 너울댄다.

■ 댄스프로젝트뽑끼 『75분의 1초』(10월15~16일 대학로 대극장)
여성 무용수들이 표정 없이 객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똑바로 선 듯 하더니 이내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왼쪽으로 기운다. 쓰러지기 직전 급하게 옆 걸음을 하며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다시 나와선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위태로운 움직임을 따라 객석의 시선이 무대 좌우로 씨줄을 긋는다. 앞뒤로도 기우뚱거린다. 그러다 엎어지고 자빠진다. 철퍼덕 철퍼덕 찰진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애처로운 동작은 묘하게도 성찰을 부른다. ‘찰나라도 중심을 지킨 적이 있었던가?’ 없다. 욕망에 기울어지고 두려움에 휘둘려 늘 흔들리고 넘어진다. 그녀들은 쓰러짐과 바로 섬의 양 둑 사이를 출렁이며 흐르는 인생을 숨 가쁘게 묘사한다.
아슬아슬하게 서서 “on(온)”이라고 외친다.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고 “off(오프)”라고 내뱉는다. 세 명의 무용수가 on과 off를 어지럽게 외치며 쓰러지고 기대고 붙잡는다. 혼자서는 on, off 이분법이다. 서든 쓰러지든 둘 중 하나다. 하지만 둘 이상이 만나면 off도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된다. 쓰러지는 off끼리 기대거나 걸치면 둘 다 선다. 여럿이 얽히고설키면 누군가는 떠받치고 누군가는 선다. 쓰러짐의 상대성과 불안정이 맞닿으면 직립의 절대성과 안정이 회복된다. 고고한 한 송이 꽃보다 들꽃이 더 아름다운 것은 몸을 기대고 서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라지 않던가. 조각조각 우스꽝스런 동작들이 모이고 합치면서 내는 울림이 깊고도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