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21세기 세계 무용의 흐름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한국 무용의 수용을 반영하는 춤 관련 축제로 확고히 자리매김하였다. 2001년 출범한 이래로 무용계의 변화양상을 응집하여 보여주고 있으므로 매해가 21세기 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분야나 장르 간 융합과 통섭을 주로 하는 최근의 예술경향에 발맞춰 무용, 연극, 복합매체 등을 아우르는 방향성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주요한 성공 요인이다. 16회를 맞이한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일명 「스파프(SPAF) 2016」은 9월30일부터 10월30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학로예술극장 등지에서 ‘무대, 철학을 담다’라는 표어로 개최되었다. 31일간 6개국 17단체 17작품이 총40회 공연되었다는 계량적인 면뿐 아니라 크리스티안 루파, 토마스 판두르, 빔 반데키부스와 같은 세계 연극계와 무용계의 거장이 내한했다는 내용적인 면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공연예술제로서의 위상을 드러냈다. 여기서는 「스파프 2016」의 무용부문을 조명하고자 한다.
국내공연 중 10월 15~1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 오른 세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장혜림이 이끄는 나인티나인아트컴퍼니(Ninety9 Art Company)의 『심연(深淵)』은 한국 고유의 정서인 한(恨)을 여러 가지 춤 이미지로 풀어간다.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여성무용가들은 차분하고 날렵한 춤의 선형을 유지한다. 잔잔하고 유려해 보이는 수면 아래에는 묵직한 기류가 동요하듯 일렁인다.
사실 『심연』은 올해 봄 『평론가가 뽑은 젊은무용가 초청공연(Critics’ Choice)』에서 첫 선을 보인 작품인데 그때보다 전체적인 완성도를 크게 상승시켰다. 춤의 흐름에 있어 강약과 장단의 조절이 훨씬 능숙해져서 작품의 몰입도를 높인 것이 주효하였다. 특히 ‘하나가 전체 같이, 전체가 하나 같이’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군무는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여덟 명의 여성무용가들이 모두 장혜림의 분신처럼 추었다는 점에서 안무가로서의 역량을 확인시킨다. 한 가지만 더 바랄 수 있을까. 엔딩을 지나치게 끄는 듯한 안무 습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기 해소적인 엔딩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춤의 기본을 바탕으로 한 컨템포러리댄스를 제대로 그리고 끈질기게 추구하는 젊은 창작자를 찾기 힘든 현 상황에서 장혜림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댄스프로젝트뽑끼의 『75분의 1초』는 불교에서 지극히 짧고 빠른 시간을 말할 때 사용하는 ‘찰나’를 시간 단위로 환산한 수치다.
공영선, 전지예, 용혜련은 쓰러지는 듯 앞이나 옆으로 몸을 기울다가 이내 진행방향으로 나아가 중심을 잡는다. 이러한 움직임 원리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힘의 적절한 분배를 통해 균형과 불균형의 순간을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보기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차츰 발전시켜 돌고 뛰고 구르고 딛는 가운데 셋이 얽히고설켰다가 떨어지기도 한다. 서로 손을 잡고 무게중심을 기울여 무대 전체를 휘젓고 다니기도 한다. 더 나아가 팔을 크게 휘두르면서 무게중심을 크게 옮겨 성큼성큼 발을 딛는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기본 움직임의 틀을 반복, 발전, 변화시켜가는 과정에서의 치밀함은 이윤정의 안무 집중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는 안무의 기본이자 정석으로, 이해하긴 쉽지만 제대로 하기는 쉽지 않다.

다크서클즈컨템포러리댄스의 『노련한 사람들』은 아이러니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아름답고 늘씬한 여성무용수들은 전형적인 발레리나의 외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의미와 개성을 결정짓는 것은 다소 짧고 다부진 모습의 김성민이다.
서로 다른 대화의 방식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문제를 과연 나는 노련하게 풀어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를 춤으로 그려간다. 다섯 명의 여성무용수들 앞에 전혀 다른 부류로 여겨지는 김성민이 등장하자 파장이 일렁인다. 그들은 차츰 서로 의식하고 동조하고 교류해간다. 고전발레음악과 팝송을 섞어 사용하듯, 기본 발레테크닉과 유머러스한 제스처를 함께 사용하는 안무는 젊은 감각을 물씬 함양하고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같은 맥락의 춤을 추더라도 김성민이 등장하지 않은 장면에서는 춤의 개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안무가로서의 고민은 필요해 보인다. 또한 신작에 대한 도전 의식도 바라는 바다.

10월 25~2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된 트러스트무용단의 『자유에 대하여』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표제어를 내걸고 있다. 가슴과 행동으로 삶을 이해하며 자유롭게 살아간 조르바에게 영감을 얻어, 일곱 명의 남녀무용가는 스스로 얽매어있는 굴레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향해가는 깨우침의 과정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특히 최진한, 김동욱, 정성태, 김영찬, 성종택 같은 남성무용가들의 춤 역량이 작품의 의미와 전개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트러스트무용단의 최근 작업 중에서 가장 정돈된 듯한 인상 또한 그들의 춤 역량에서 비롯될 것이다. 한편으로 주제나 콘셉트를 제시한 후 실행 주체인 무용가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주는 작업스타일에서조차 작품을 관통하는 안무의 구성적인 골격은 세워져 있어야 한다.

해외초청공연으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울티마베즈의 『스피크 로우 이프 유 스피크 러브(Speak Low if you Speak Love)』로 10월 25~2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을 장식하였다. 빔 반데키부스가 이끄는 울티마베즈는 2005년 『순수』와 2013년 『왓 더 바디』 등으로 국내 무용계에서도 상당히 높은 명성과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사랑의 여러 가지 의미와 모습은 야만과 폭력, 육체적인 욕구,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 애틋한 감성 등으로 시시각각 변화한다. 야만과 감성이라는 상반된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이중적인 요소를 다채로운 춤과 라이브연주로 그려가는 것이다.
고도로 숙련된 무용가들이 펼치는 테크니컬한 움직임은 작품에서 가장 큰 볼거리다. 수 명의 남여무용수들은 현대무용에다가 어딘가의 민속무용, 아프리카댄스, 클록댄스, 클럽댄스 그리고 운동과 곡예 등을 한데 뒤섞은 듯한 움직임을 전개한다. 이러한 춤으로 그려지는 사랑의 갖가지 의미와 모습은 드럼, 기타, 오르간, 피리, 보이스의 리드미컬한 라이브연주로 더욱 큰 고조와 풍성함을 갖는다. 사랑 그 자체를 대변하는 춤을 폭발적으로 이끌다가도 다음 순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고 관계의 부조리함을 꿰뚫고 시공간의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빔 반데키부스의 예민함과 예리함은 여기서도 묻어나온다. 사랑 한가운데서 목적과 방향감각을 상실한 인간 군상들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다만 전작들에 비해 그 강도는 많이 희석되어 있다.
『스피크 로우 이프 유 스피크 러브』는 빔 반데키부스의 작품들 중에서 주제 표현에 있어 보다 덜 묵직하고 치열한 반면 춤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보다 더 활발하고 다채롭다. 빔 반데키부스에 대한 평가와 기대가 후자보다는 전자 쪽으로 향해 있으므로 이번 작품은 국내에 소개된 전작들에 비해 다소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본수준 자체가 상당히 높은 빔 반데키부스의 연출과 안무는 적지 않은 젊은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무엇보다도 30년 이상 울티마베즈를 통해 굵직한 예술적 방향성을 지키면서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표현방법을 시도하는 빔 반데키부스의 고갈되지 않은 창작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국내 관객의 빔 반데키부스 바라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캐다나 몬트리올댄스는 안무가 브누와 라샴브르와 협업하여 만든 『프리즘(Prisms)』을 10월 23~24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국내 초연하였다. 빛과 색이 각도나 명암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험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변화를 중간에서 받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무용가의 몸이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착시효과들은 마치 매직아이를 보는 듯하다. 실제로 공연 전에 관계자가 여러 가지 매직아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춤 공연에서 새로운 시도를 단행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움직임에 대한 창의적인 발현이 부족한 채 여러 시각적인 작용에 의존하기 때문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에 대한 집중력은 흐트러졌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엘리노어 퓨에터라는 여성무용가라는 존재 때문이다. 우선 그녀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전신에 새겨진 근육의 섬세한 결이 깊은 인상을 심어놓고 있으며 특히 복근의 경우 여느 남성무용가 이상으로 정교하고 선명하였다. 다소 중성적인 외모까지 더해져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한 조각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몸으로 수행하는 조형적인 움직임 역시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숨을 쉬는 순간까지 그러했다.

협력프로그램으론 『로잘린드(Rosalind)』가 10월 20~21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 펼쳐졌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한영 합작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로잘린드』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모티프는 딴 것이다. 여자주인공 로잘린드는 숙부의 음모로 몰락한 공작의 딸로, 모함을 피해 도망친 아덴의 숲에서 올랜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안무가 제임스 커즌스는 로잘린드를 옭아매는 전통적인 성역할과 사회적 고정관념에 주목하여 이를 자기만의 춤 이미지로 재창조해내고 있다.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로잘린드의 복잡미묘한 내면갈등, 자기정체성 찾기, 해방으로의 의지 등을 절제되면서도 강한 에너지를 내재한 추상적 움직임으로 그려간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네 명의 무용가인 김희정, 가와사키 치히로, 김성현, 조인호가 서로 교감하여 흐름을 공유하는 과정이 또 다른 관전포인트였다. 제임스 커즌스는 영국에서 주목받는 신예 안무가로서의 가능성을 이 작품을 통해 국내 무용계에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