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동숭문화광장

엊그제 “문화정책과 예술의 미래”라는 주제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한·영문화예술컨퍼런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국예술위원회와 한국예술위원회의 문화정책에 관한 발제가 끝난 뒤 청중들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왔다.
“영국에서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의 원리)’은 지금도 변함없이 중요하게 받아들이는가?”

잉글랜드예술위원회 문화예술담당 부총재인 사이몬 멜러(Simon Mellor)는 이렇게 답하였다.
“물론 여전히 중요한 원칙이다. 우리는 장관이 새로 올 때마다 팔길이 원칙이 왜 중요한지, 그것을 지키는 것이 문화부는 물론 정권과 정치인들에게도 왜 득이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정치권은 골치가 아파서도 문화 분야에 함부로 손대지 못한다.”

필자는 이번 학기에 어느 국립대 경영학과에서 ‘기업의 문화마케팅’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주 학생들의 과제발표 주제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로 도시재생 성공사례’였다. 스페인의 빌바오, 영국의 글래스고우와 게이츠헤드 등의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난 후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사례조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왜 실패사례가 더 많은가요?”

나는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외국의 성공사례를 보고 문화적 관점이나 차이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그대로 따라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충분한 논의와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적어도 10년 이상 꾸준히, 성과가 있을 때까지 지속적인 지원을 했다면, 우리는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비용으로 시작부터 하고 본다. 그리고 성급하게도 정권기간 중에 성과를 보고 싶어 한다. 그나마 정권이 바뀌면 또 다른 사업이 등장하고 지난 것은 잊힌다. 그런 것이 차이다.”

지난 지방선거 때 어느 대도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던 시장 후보에게 문화계가 지지성명을 발표하면서 대다수 예술인들이 그쪽에 줄을 섰다. 상대편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예술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정작 선거는 지지율이 한참 뒤졌던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면서 끝이 났다. 진짜 웃지 못 할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문화계 기관장들을 갈아치워야 할 마당에 인물난에 봉착한 것이다. 상대편을 지지했던 예술인들을 제외하고 나니 정작 믿을 만한 인물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부분 외부에서 수혈을 했다. 임기만료가 되었건 말건 무조건 물갈이를 해야 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지난 2012년 대선 때도 예술인들이 단체로 줄을 서는 일이 있었다. 모 예술단체 간부들은 드러내놓고 어느 후보를 지지할지 투표를 강행했다는 말도 들렸다. 그 단체는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이런 저런 불이익에 시달렸다. 예술인 개인이 아니라 예술인들의 집합체가 특정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과 그들이 괘씸하다고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려서 정부의 지원을 원천 차단한 짓거리는 물론 도덕적으로 경중이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단체차원의 그런 정치적 줄서기가 앞의 지방대도시의 예술인들의 줄서기와 도덕적으로 다를까?
우리 문화계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초토화라고 할 만큼 짓밟힌 사태를 우리는 망연자실 목도하고 있다. 그들의 전횡을 가능케 했던 부역자들에 대한 공격도 드세다. 과연 부역자들은 누구일까? 그 ‘몇몇 사람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정치인, 공무원, 예술인, 예술행정가들의 이름도 여기 저기 드러나 있다. 그 ‘모두’는 아마도 때가 되면 뒷전으로 물러나 잊히거나 그중에도 재주가 출중한 이들은 다음에도 또 다른 ‘몇 몇 사람들’과 동고동락할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나 나도 몇 마디 묻고 싶다.
또 다른 시대가 오면 우리 문화판도 누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할 만큼 제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 문화적 판단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밀리는 일이 줄어들까? 더 이상 정치에 줄서거나 그들과 동고동락하려 애쓰는 예술인들은 사라지고 없을까? 장관이 새로 올 때마다 ‘지원하되 간섭해서는 위험하다’고 말하는 공무원과 예술행정가들이 손해보고 밀려나는 일은 없어질까? 천년을 바라본다는 문화가 고작해야 5년밖에 안 가는 정치와 하루살이처럼 놀아났다는 이 희대의 전설은 언제까지 우리를 부끄럽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