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그림 박제영

인상파 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수련(睡蓮)을 그리는 인상파 화가라고 한다면 아마 딱 한 사람이 떠오를 텐데요. 바로 모네, 끌로드 모네입니다. “바다를 잘 그리고 싶다면 매일, 매시간 같은 장소에 가서 바다를 관찰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바다가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네가 한 말이지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얘기할 때 흔히 ‘앙플레네르(En Plein Air)’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영어로는 ‘In the Open Air’라고 하는데요, 실내에서 상상으로 그리는 풍경이 아니라 실외에서 자연광 아래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무궁구진한 색으로 변하는 풍경을 그린다 해서 붙은 말입니다. 모네가 그린 수많은 연못과 수련은 햇빛에 따라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여주지요.
수련을 얘기하는데 모네 얘기를 꺼낸 것은 실은 수련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면, 제대로 즐기려면 모네처럼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한 나절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햇빛을 받은 수련은 조금씩 그 모양과 색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변화를 다 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수련을 보았다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흔히 수련을 물 위에 피는 연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은 수련과 연꽃은 다른 식물입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연의 경우 수면 위에 펼쳐진 뜬 잎과 수면 위로 솟아올라 펼쳐진 선 잎이 함께 있으며 꽃이 수면보다 높이 솟아올라 피는 정수식물(挺水植物)로, 표면은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발수성이 있어서, 물이 묻지 않고 연잎위에 방울로 맺힌다. 반면에 수련은 잎이 모두 수면에 펼쳐진 뜬 잎의 부수식물(浮水植物)이라서, 수면 위로 잎이 높이 솟는 경우가 없이 꽃도 대부분 수면 높이에서 피고, 발수성이 없어서 잎의 표면에 물이 묻는다”고 나옵니다. 수련을 영어로 물에 피는 백합, Water Lilly라고 하고, 연꽃을 Lotus라고 하지요. 서로 태생이 다른 꽃입니다.

기왕에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수련이라는 이름, 한자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제가 제목에 굳이 한자를 병기했는데 그럼에도 무심코 넘어간 분들도 계실 텐데요. 수련의 ‘수’는 ‘물 水’가 아니라 ‘잠잘 睡’입니다. 그러니까 물 위에 핀 연꽃(蓮)이 아니라 잠자는 연꽃이라는 뜻입니다. 꽃 핀 모습 좀 더 보고 싶어도 해가 지면 어김없이 꽃을 닫아버리니 그 모습 보면서 우리 조상들께서 잠꾸러기 꽃이라 했겠지요. 어쨌든 수련이라는 이름은 잠꾸러기 꽃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심코 睡蓮을 水蓮으로 쓰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자를 없애자는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한자가 없는 한글은 반쪽짜리이지요. 하여튼 수련은 피는 것보다 지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하는 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가 있지요. 바로 정진규 시인의 「수련睡蓮」입니다.

닫기는 고요로 피는 꽃, 꽃이 터질 때마다 꽃을 꿰매는 무봉無縫의 손을 보았다 닫기는 고요를 보았다 그렇게 터지는 또 다른 꽃을 보았다 한낮이 지나면 수련들은 어김없이 입을 다문다. 닫기는 꽃이여, 닫겨서 피는 꽃이여 터지는 고요여, 고요의 비수匕首여
- 정진규, 「수련睡蓮」 전문

어떤가요. 그야말로 완벽하게 ‘睡’에 주목한 작품이지요. 해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면 조금씩 눈을 감기 시작하는 수련. 닫힘으로써 열리는 꽃. 바로 수련이지요. 닫힘이 열림이라는 말. 닫힘으로 완성된 꽃이라는 말. 이쯤 되면 떠오르는 시가 또 있습니다. 바로 김선우의 「완경(完經)」입니다.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 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 김선우, 「완경(完經)」 전문

김선우 시인 또한 수련에서 주목한 것은 닫힘에 있지요. 담힘으로 완성되는 꽃. 그러니 엄마에게 속삭이는 것이지요.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시 중에 으뜸은 연시(戀詩)이지요. 수련에 연심을 담은 것으로 대표적인 작품이 김춘수 시인의 「수련별곡」이지요.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 김춘수, 「수련별곡(睡蓮別曲)」 전문

혹시나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김춘수 시인의 「수련별곡」도 대부분 ‘水蓮別曲’으로 나오더군요. 이 또한 한자를 모르니 생긴 오류일 텐데요. 그런데 문득 오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왜냐하면 이 「수련별곡」에 대해서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이 시 ‘수련별곡’을 남긴 곳이 바로 동성로의 2층 찻집 ‘세르팡’이다. ‘세르팡’이란 찻집 이름도 시인이 지었는데 ‘뱀’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일본의 유명잡지 이름이기도 했다. 이 찻집 주인이 바로 수련별곡의 주인공인 배화여고 출신의 권수연(?)이다. / 세르팡에서 시인은 ‘꽃’을 이야기 하고 ‘처용단장’을 나누며 ‘내가 죽어도 이름이 100년은 갈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70년대 초, 20대 초반의 팔등신 미인 수련과 마흔 중반 시인의 사랑은 대구백화점 지하 생맥주집에서 싹텄다. / 그곳 0번 테이블의 여급이었던 수련을 남다르게 아꼈던 김춘수는 그녀에게 찻집을 차릴 것을 권했고, 계명대 미술과에 편입까지 주선했다. 김춘수가 ‘나의 나타샤’로 부르던 수련에게 시인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 김춘수 시인의 삶과 문학사에서 대구문단은 극단적인 실험을 추구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랑의 추억도 안겨줬다. “대구는 내 생애에 가장 오래 머문 곳이다. 내 개인사에 있어서 참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고장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 조향래 기자, 「대구매일신문」 2006년 7월 24일자

그 많은 꽃 중에서 하필이면 왜 수련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어쩌면 물장사를 하는 꽃. 그래서 水蓮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정말로 수련별곡은 睡蓮別曲이 아니라 水蓮別曲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물론 근거 없는, 그냥 해본 생각입니다. ‘찻집과 수련’ 하면 떠오르는 시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김수우 시인의 「수련 지는 법」입니다.

단골찻집 주인이 바뀌었더군 꽃핀다고 들러도 싱거운 눈웃음, 꽃진다고 들러도 맹물 손인사, 잊힐 뻔 잊힐 뻔한 안부마다 한 톨 답례 고맙더니 그 씨앗 받아 여기저기 나누었더니 어느 결에 헤어지고 만 게야, 마음 비운 사이

수련 지는 법을 들었네 몇날 철없이 꽃비 뿌리거나 제 열정에 겨워 몸던지는 게 꽃지는 방식이거늘 수련은 잠잠히 물 속으로 돌아가지 소금쟁이가 딛은 고요를 돌아보는 어느 결에 송이째 물에 잠긴다네, 마음 비운 사이

고운 사람 내게 수련처럼 졌으니 나도 그에게 한 꽃자리일까 고운 사람 누구에겐가 수련으로 피어날 테니 물속 줄기, 먼 산 하나 풀어내리라 물그림자 흔들리는 그, 어느 결에 내 옷자락도 젖을 테지, 그, 마음 비운 사이
- 김수우, 「수련 지는 법」 전문

문득, 김춘수 시인의 「수련별곡」에 대한 후일담 같다는 생각. 혹은 김춘수 시인의 영전에 바치는 헌시 같다는 생각. 이 또한 근거 없는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어느새 한 해를 마감하는 달입니다. 한 해가 닫히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수련처럼 매해, 매달, 매일… 닫히면서 열리는, 닫힘으로 피는 그런 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한 해가 저무는 것을 슬퍼하거나 낙담할 이유는 없겠지요. 올 한 해도 꽃과 함께 시와 함께 행복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