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안신희 안무의 『선택-기억과 공존의 이유』(서강대 메리홀 2016.11.23)
메리홀에서 『선택』을 보며 중년 남성들이 떠오른 것은 지나친 것일까. 무대에서는 중년 여성 무용가 네 명이 춤을 춘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부터 계속 무대를 떠나지 않은 그들이기에 나이가 들어서도 무대에 서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많은 무대에서 젊은 여성댄서들을 보게 되니까 중년 여성 네 명의 춤은 오히려 신선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들은 어디 갔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년 남성들은 다리를 못 움직이는가.
영화 「아가씨」를 보면 섹시한 볼거리가 많다. 박찬욱 감독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말할 게 없지만 결국 ‘남성의 실패와 여성의 승리’가 주제인데, 도대체 그 성공과 실패가 어디서 기인 하는가 하는 것이 포인트! 하정우는 김민희를 꼬셔야 하고, 조진웅은 김민희를 휘어 잡아야 하고, 김태리는 하정우와 김민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김민희는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봐야하고… 얽혀서 돌아가는 그들의 판타지! 여자는 남자의 성적욕망과 허세에 갈고리를 걸고 남자는 어김없이 속수무책 쓰러지고! 여자는 몸으로 말로 수다를 떨며 연대하지만 남자의 허세와 성적욕망은 공유할 수 없고 수다 떨 수 없고 연대 할 수 없고 푸른 연기 속에서 서로 죽이고! 똑똑한 여자들은 바보 남자들을 물리치고 새 세상으로 떠난다. 결국 여성의 승리!
『선택』을 보며 상상한 것은 저 네 명의 출연자를 같은 나잇대의 남성 무용수로 교체 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상상은 그저 상상만으로. 왜 어려울까 생각해보면 댄서가 없는게 아니라 남성들은 수다 떨 수 없기 때문! 『선택』에 출연한 네 명을 그들의 목소리로 구분해 보면 ‘괜찮아요’님(박명숙) ‘사랑해요’님(안신희) ‘고마워요’님(김은희) ‘미안해요’님(이고은) 인데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에 탁자 세 개, 의자 20 여개가 흩어져 있고 인트로가 끝난 다음 다 치워지고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수다를 떠는 것이다.
‘괜찮아요’님이 강아지 얘기를 하자 ‘사랑해요’님은 온몸을 긁어댄다. 말만 들어도 알러지가 생긴다며 수다를 떤다. 네 명은 수다 떨다가 한 명씩 자기얘기를 한다. ‘미안해요’님이 먼저 귀여운 발레 소품을 연기한다. 남자 무용수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조명받으며 아름답게 붕 날랐던 얘기를 한다. 그리곤 ‘고마워요’님의 한국춤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며 내면의 고통과 회한을 풀어 내는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댄서가 집중하면 관객이 집중한다. 순간적으로 몰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사랑해요’님이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다니던 얘기를 하고 ‘괜찮아요’님의 춤이 이어진다. 그들 모두의 춤에서는 원숙미가 느껴진다. 경험은 몸이 더 위로 솟구치지 못하는 것을 훌륭히 커버한다.
‘사랑해요’님은 변곡점 마다 나머지 셋을 이끌며 공연을 이끌고 나가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괜찮아요’님은 무대 위를 뛰지 못하고 바닥에서 온몸을 휘저으며 ‘옛날에 섹시했었다’고 했지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씀드린다. 한 명 한 명은 자기 얘기를 하며 울고 몸부림 치지만 서로가 위로하고 지켜봐주기에 아픔들은 치유되고 극복된다. 네 명이 함께 무대위에서 구르고 밀고 댕기는 모습은 보기 좋아서 참 아름다운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틈 날 때마다 울리는 노래 ‘해피 투게더’는 이 작품이 관객에게 말하는 것이다. 함께 행복하자고, 함께 행복하라고! 즐거운 공연이었고 행복한 관람이었다. 출연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해가 바뀌어도 다시 볼 수 있길 기대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시 남성들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남성들은 이들을 배울 수 없을까.중년 남성에게 무대를 허할 수 없을까(그러나 번득 국수호 선생의 『용호상박』이 생각난다. 만나기만 하면 허세 부리는 남자들). 왜 남자들은 수다 떨며 연대 할 수 없는 것인가(그럴 수 있다면 여성만큼 평균수명이 늘어날 텐데). 왜 남자들은 나이 들며 독불장군이 되어 가는가. 정녕 바보같은 남자들을 구원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선택』을 보며 중년 남성을 걱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 필립 드쿠플레(11월11~13일 LG아트센터)
세상의 모든 공연을 볼 수도 없고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소식은 듣는다. 흔히 작품 얘기를 하다보면 그 작품에 얽힌 옛날 얘기하기 십상이고 종적인 얘기를 늘어 놓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수많은 공연이 벌어진다. 횡적으로 동시대에 어떤 공연들을 하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래서 ‘안 본 것도 본 것처럼’ 신문기사, 홈페이지, 유튜브 등을 통해서 뉴욕과 도쿄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살펴본다. 서울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필립 드쿠플레(Philippe Decoufle)가 공연을 했다. 보지 못했다(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R석 8만원, S석 6만원. 이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3회 공연을 했다. 국제 공연시장에서 서울은 일본시장에 속해 있다. 팝스타, 클래식, 전시 할 것 없이 서울 단독 행사는 좀처럼 없다. 일본 돌고 마지막에 서울 찍는다. DCA도 서울 단독 공연은 아닐 것이다. 일본 신문을 뒤져본다. 일본에서는 10월15~16일 나고야, 22~23일 니가타, 28~30일 사이타마 공연을 했다. S석 6,000엔에서 6,500엔, 서울 공연과 가격은 비슷하다. 일본 홍보 영상과 유투브 영상을 본다. 이건 서커스, 마임, 생음악, 영상이 짬뽕된 쇼! 드쿠플레가 탄츠테아터를 좋아 한다더니, 피나를 좋아한다더니! ‘파우스트’는 왜 갖다 붙인건지 모르겠다. 이것 저것 짬뽕해서 새로운 서커스광대쇼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인가.

■ 아크람 칸(11월4~13일 뉴욕 New Victory Theater)
뉴욕에서는 11월4일/13일 아크람 칸(Akram Khan)이 공연했다. 그는 여러 차례 내한공연으로 한국에도 팬들이 많다. 나는 실비 길렘, 줄리엣 비노쉬와의 공연을 봤는데, 그녀들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고 칸의 유연한 몸놀림만 기억난다. 에너지를 가득 담은 몸이 혼자 흥분하지 않고 절제 속에서 파워를 보여줬다고 기억한다. 그때 인도춤에서 온 칸의 손동작을 보며 정현종 선생의 싯구절을 중첩시켰었다.
저 손 움직이는 거 좀 봐. 보이지 않는 꽃향기를 따라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잡을 수 없는 꽃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며 물을 떠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자의 허리를 애무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정현종 「손」, 인도시편4

이번 달에 칸이 뉴욕에서 한 공연은 『Chutto Desh』라는 제목, ‘small land’라는 뜻이란다. 공연자료를 훑어보니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heartwarming story)’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애니메이션을 적극 활용한 것 같다. 이 무대가 보고 싶다. 아크람 칸의 손을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잡을 수 없는 꽃을 잡으려 하는 그 손을.

■ 샘 킴(11월9~19일 뉴욕 Chocolate Factory)
뉴욕의 또 다른 극장(Chocolate Factory)에서는 샘 킴(SAM KIM)의 『Fear in Porcelain』이라는 작품이 올랐다. 샘 킴이라… 요리사? 가수? 알려지지 않은 한국출신 무용가?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우선 샘 킴은 여자다. 한국계 맞다. 어려서 이민갔고 뉴욕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주목받고 있다(그러니 NYT에서 공연한다고 기사 쓰겠지). 근데 나의 관심은 그녀의 춤인데, 여러 공연장 홈피에 있는 그녀의 작품들을 대략 훑어보며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이게 뭘까… 그녀의 춤에서는 요즘 서울의 댄서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한국의 옛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 오우에 신타로(11월11~12일 도쿄 Aoyama Cross Theater)
도쿄 아오야마 크로스시어터(Cross Theater)에서는 11월11~12일 오우에 신타로(大植眞太郞)가 공연했다. 아사히 신문은 오우에 신타로의 신작공연을 인터뷰까지 싣고 ‘국제적으로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2016년 3월부터 『담스』라는 작품으로 일본 전국 15곳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번 공연이 그 작품을 잇는 신작이라는 소개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 댄스공연장에 갈 때면 내용이나 춤보다도 음악이 인상에 남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체나 댄스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시작점이다. 무대 위에서 댄스의 부수적 BGM으로 음악이 사용된 것을 음악에 정면으로 맞섰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볼레로에서 한 개의 도달점이 있고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다시 새로운 목적이 생기는 - 이미지를 댄스와 신체로 표현하고 싶다.”
오우에 신타로의 비디오를 이것저것 둘러보니 그는 어려서 발레 무용수로 데뷔했고 이후 현대춤 작업은 실험적인 작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비디오로 본 그의 한 작품에는 하얀 무대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몇몇이 한쪽 모퉁이에서 꼼지락 꼼지락 거리는 것이었는데 공연내내 무대를 넓게 사용하지 않고 구석에서 꼼지락거리다가 끝나는 것이었다. 신작에서 볼레로를 사용하는 것과 음악에 정면으로 맞서고 싶다는 창작욕은 새로운 실험일까 혹은 발레로의 복귀일까. 그의 새로운 신작은 『잊어라 볼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