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파사무용단 황미숙 안무의 『버려야 할 것들…』(11월18~19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
생명이 다니는 길은 막힘이 없다. 바람 같은 퉁소 소리가 앞선다. 엄마의 양수처럼 아늑하고 평화롭다. 몸이 천천히 움직인다. 땅을 닮아 넉넉하고 하늘을 본떠 자유롭다. 생명이 웅숭깊어간다. 몸의 움직임이 잦아지면서 ‘내’가 자란다. 몸과 몸 밖을 구분한다. 눈으로 금을 긋고 동작으로 영역을 나눈다. 움찔 움찔 ‘나’를 내세운다. 퉁소 소리도 따라 거칠어진다. 잠결 같이 아련한 핸드팬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좋은 것에 몰리고 나쁘다는 것에 흩어진다. 서로 좋은 걸 더 가지려 손을 뻗는다. 손에 든 걸 꽉 움켜쥐고 내 것임을 주장한다. 만족할 줄 모르고 가지려는 동작을 반복한다. 핸드팬 소리는 잠을 깨우려는 듯 커지고 빨라진다. 여럿의 잠든 몸짓은 부질없이 분주하다.
남과 여는 가까운 듯 멀어지고 먼 듯 가까워진다. 다가선 둘은 마주 잡고 기대고 감싸 안고 돈다. 상대가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지은 것임을 몸짓으로 되새김한다. 서로 아끼고 탐닉한다. 열정의 용광로에 하나로 녹아든다. 따질 과거도 걱정할 미래도 없다. 몸짓은 다시 하늘이고 바람이다. 그러나 눈 속에서까지 봄꽃을 찾으려 들면서 사달이 난다. 몸짓이 어긋난다. 다시 ‘너‘와 ‘나’로 갈린다. 떨어져 있으면 혼자라서 외롭고 곁에 있으면 더 갖지 못해 괴롭다. 매달릴수록 멀어진다. 원망하면서도 갈구한다. 쫓아가 안기지만 목마름은 더해간다. 구름 속을 떠돌던 몸짓은 이내 폭풍우에 휘감긴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둘은 분분히 흩어진다.
여럿이 모이자 앞과 뒤가 생기고 위아래로 나뉜다. 모두 앞서가고 올라가려 한다. 몸이 부딪친다. 눈을 부라린다. 무술 닮은 몸짓이 난무한다. 주먹을 쳐들거나 가슴을 밀쳐내기 일쑤다. 모두 ‘나’ 뿐이다. 앞서 가거나 먼저 오른 자는 두려움에 사나워진다. 뒤쫓거나 따라 오르는 자는 억울함에 모질어진다. 헤비메탈 음악이 거친 춤사위를 태우고 오토바이처럼 질주한다. 미간은 찌푸려져 있고 몸은 고래고래 악을 쓰듯 경련한다. 끓어오르는 화를 견디지 못하고 옷을 벗어 힘껏 패대기를 친다. 속은 여전히 불구덩이다. 거센 몸짓이 마구 풀무질을 해댄다. 불길이 치솟는다. 몸짓은 더 격렬해진다. 불길이 육신을 휘감는다. ‘나’는 썩은 고목처럼 속절없이 고꾸라진다.
규칙적인 타악기 소리에 딱 딱 맞춰 걷는다. 소리에 몸이 꿰인 것같이 동작이 일정하다. 다니는 길도 하나다. 바둑판 모양으로 빛이 내리 쬐는 직선만을 밟는다. 텅 빈 눈빛이다. 형상은 사람인데 움직임은 기계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모여서도 홍학 떼 모양으로 한 동작이다. 익숙한 리듬과 멜로디가 흐르자 반사적으로 군무를 춘다. 의장대 같이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기억과 습관에 새겨진 동작만 거듭한다. 지금을 숨 쉬면서도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덩어리에 갇혀 있다. 그 너머는 안중에도 없다. 있다 해도 낭떠러지라고 지레 겁먹고 선뜻 한 발 내디딜 엄두도 못 낸다. 가보지 않아 불안하다. 혼자서는 두렵다. 따지고 후회하면서도 길들여진 길을 두서없이 걷는다.
세 개의 긴 끈은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됐다. 끈 하나는 더 많이 가지라고 질기게 잡아끈다. 또 다른 끈은 분을 왜 참느냐며 옥죈다. 나머지 하나는 타성을 벗어나면 안 된다며 칭칭 싸맨다. 몸은 세 개의 끈을 ‘나’라고 여기고 붙잡는다. 끈에 걸리고 졸려 고통스러울 때 마다 벗어나려 하지만 더 휘감긴다. 몸부림이 애달프다. 마침내 끊어내려는 마음과 붙잡으려는 마음 둘 다를 놓는다. 질기게 몸을 감쌌던 끈이 하나하나 힘없이 풀려 나간다. 머뭇대던 몸짓은 마침내 바람이 되고 하늘이 된다. 음악은 달이 돼 비추고 별이 돼 반짝인다. 무대 한 복판에 둥근 고리 모양의 빛이 비춘다. 춤이 빛과 하나 되더니 어느덧 춤꾼도 사라진다. 빛나는 춤사위가 한가로이 홀로 노닌다.

■ 서울발레시어터 제임스전 안무의 『시집가는 날』(11월17~18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막에 올라 있는 제목이 눈길을 확 잡아끈다. 되바라진 빨간색이다.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서체까지 요염하다. 공연 시작 알림음이 울렸다. 암전이 없다. 막이 치마 들치듯 그냥 쑥 오른다. 속속곳 같은 샤막 안으로 빨간 무대가 비친다. 여기저기 줄이 내려져 있다. 그 사이 사이로 남녀가 쌍쌍이 춤을 춘다. 월하노인은 만남과 이별을 점지하느라 바쁘다. 줄을 잡은 남녀는 인연의 세레나데를 추지만 줄을 못 잡은 쌍은 이별의 엘레지에 머리를 감싼다. 그렇게 빨간 이야기가 펼쳐질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객석에 불이 켜진다. 객석 뒤에서 한 여인이 나타난다. 웬 모자란 소녀도 뒤따른다. 여인은 관객을 향해 야릇한 농담을 던진다. 객석엔 빨간 웃음기가 번진다.
여인은 무대에 올라 걸쭉한 창으로 극중 인물을 소개한다. 마당극의 멍석이 깔린 무대 위로 갑분이네 식솔들이 까르르 쏟아져 나온다. 몸으로 풀어낸 그 집안의 가풍은 통속적이다. 춤사위는 익살맞고 쾌활하다. 춤이 담아낸 심상은 좀스럽고 저속하다. 갑분이는 방정맞고 그 애비는 음탕하다. 곱고 유려할 줄 알았던 이쁜이는 맹랑하다. 눈빛과 입 모양까지 요사스럽다. 신랑감을 절름발이라고 소문내는 장본인은 이쁜이다. 놀랍게도 갑분이 애비까지 호린다. 끈적한 몸짓이 무대 여기저기에 욕망을 토악질해댄다. 한바탕 놀아보자고 이야기를 틀었지만 너무 나갔다. 감칠맛 나는 골계미도 살짝 비껴갔다. 발레와 마당극이 버무려진 공연은 19금 미스터리 물로 뜸들어갔다.
춤이 재잘거림이라면 음악은 천둥소리다. 일곱 명의 연주자는 무대 위쪽을 다 차지했다. 양악기를 살짝 곁들인 국악기 위주의 소리는 감정이 풍부하고 스케일이 크다. 용오름 같다. 소리는 월하노인이 곧고 큰 춤사위로 이쁜이를 막아 설 때 동작과 하나로 통했다. 월하노인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결혼식과 함께 화려한 발레 동작이 펼쳐진다. 그 몸짓을 즐기려던 찰나 관객은 또 의외의 일격을 당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카레나’ 같은 춤을 함께 추잔다. 많이 일어나 췄고 당황한 몇몇은 밖으로 나갔다. 공연은 잇속을 차린 이쁜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퇴장하면서 끝난다. 멍석 위의 발레. 파격의 갖은 양념에다 관객 동원을 고명으로 얹은 메뉴가 입맛을 돋우었지만 뒷맛은 아리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