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30주년 기념 신작공연(10월15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즐길 것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는 보고, 듣고, 먹는 것 모두가 즐길 거리가 될 만큼 다양한 자극이 일상적일 때가 허다하다. 어지간한 크기나 웬만한 일탈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는 시대는 일정 부분 자신에게 조차 무관심한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인 사회이다. 역사를 철학의 바탕으로 공부한 예술사회학자들은 친밀한 공동체를 무관심이 팽배한 불안한 시대의 해답으로 제안하고 있다. 무용이 이데올로기로 사회 체계 안에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20세기말 창단한 현대무용단사포가 30주년 기념 신작이란 타이틀로 『사포의 겨울 숲』을 공연했다.
1993년 『그들은 꿈꾸고 있었다』라는 남북분단을 소제로 한 사포의 작품은 상해 예술제 초청을 받아 상해 공연을 하고 사포 단원 모두는 그 곳의 임시정부를 대학무용단으로 시작한 사포의 근원지인 원광대학교 중문학과의 협조로 방문하고 그들의 춤에서 만들어 낸 가상의 시간의 박제된 실체들 중 하나와 마주 했었다. 이후 1995년에 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 공연을 시작했다. 삼부작 중 첫 번째 작품 『그해 오월』(1995)은 광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했고 두 번째 작품 『편애의 땅』(1997)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1층을 모두 무대로 만들고 2층 원형의 객석에서 만 무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1997년 『그들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삼부작을 완성하는 동안 사포의 근거지인 전북의 지역성을 춤으로 기록하는 동학 관련 작품 『사라진 것에 대한 진혼곡』(1994), 『다시 핀 그대에게』(1996), 『그대여 돌아오라』(2005)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공연 했었다. 단지 사회적인 소제를 무용으로 만드는 작품성향을 지닌 단체라고 정의 내리기에 사포는 참으로 일관적이게 춤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포를 창단하고 현재 예술감독인 김화숙 교수는 당시 무대 위의 작품으로만 모든 것 - 작품세계, 무용수 춤의 전문성과 숙련도, 무대 미술, 음악 등을 포함한 안무 수준 - 을 평가 받았던 시기에 대부분이 불편해 했던 지역(특히 전라북도)에서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의도들 내세워 무섭도록 많은 신작 공연을 주관하고 주도했다. 김화숙 예술감독의 학교 퇴직 후 30주년을 맞은 사포의 신작이 궁금했다. 무용은 이제 무대 위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사회에서 접근성을 가진 문화적 행위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고 무용의 지각 변동을 사포는 어떻게 느끼고 있고 또,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야외무대 공연 초청에서 늘 초청 측(광주비엔날레운영위원회, 부산국제여름무용축제, 금호문화재단 등)에 작품 - 『9월의 신부』(1995), 『손을 주세요』(1997), 『여름 달』(1996),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2006), 『눈물어린 나의 사랑』(2009),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1993) 등 - 의 질로 찬사를 받았던 사포는 전주의 그냥 빈 공간 - 전주 우진문화공간 등 - 혹은 평범한 상업적 기능의 공간 - 카페나 레스토랑 - 을 단박에 소극장으로 만들고 마치 그 공간이 있어서 작품을 만든 것 같은 속임수로 보는 이들을 경악하게 만든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5일 지역 축제가 한창인 토요일 전주는 주말분위기로 들떠 있었고 한국소리문화의전당도 북적여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극장은 언제나 그렇듯 연지홀 로비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분위기는 밖과 사뭇 다르다. 맑고 드높은 푸른 10월의 청명한 햇살과 바람을 뒤로하고 어둡고 무거운 기운의 극장으로 들어가려고 삼삼오오 모여 수근 거리는 사람들에게서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유대감이 느껴진다. 막이 오르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사포의 『겨울 숲』은 앙상한 가지에서 튼실한 밑동을 느끼고, 말라 비틀어져 보이는 가는 가지들 속에서 여리게 흐르고 있는 생명의 물소리를 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50여분의 만남동안 작고 여리고 앳띤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기에는 턱없이 거칠고, 결이 두껍고 그래서 억세져버린 우리의 감각이 잃어버린 섬세함을 찾아야 한다고 차분하고 친절하게 반복 화법으로 어두운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눈에 속삭였다.
유난히 어두운 톤의 음악과 가슴이 서늘해지는 무대 미술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겨울 숲 사진이 영상으로, 때론 무대 장치 같은 미술품으로 둔갑하며 영상과 미술이 빛을 통해 부리는 마술 같은 첨단의 무대 테크닉은 얼마 전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본 카롤린 칼송(Caroline Carsson) 무용단의 조명을 생각나게 했다. 이제 교과서에서 보던 조명술(Alvin Nicolas)이 보편화된 시대임을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전주 공연장을 목적지로 하고 이동하면서 느낀 교통상의 불편함이 고의적 방치로 느껴질 만큼 이 시대는 못하는 것도 안 되는 일도 없을 것 같은 기술과 과학의 만능 시대임을 새삼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불평등과 불이익의 원천으로 취급 되었던 지역성과 문화적 소외가 쌍으로 특수성과 정체성으로 읽혀지는 변화와 유행의 시대를 함께 지나고 있는 동시대 무용단 『사포의 겨울 숲』은 인간 사회에서의 정치적, 사회적인 소외와 차별을 넘어선 인류 생명 공동체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생윤리로 동시대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어떤 종교인의 강연보다도 그 어떤 윤리학자의 철학 서적보다도 힘이 있는 예술로 우리를 선도하고 있다.
『겨울 숲』 첫 장면은 객석을 뒤로 하고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아 마른 등을 내놓고 있는 가녀린 여자의 뒷모습이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가지 그러나 밑둥 튼실한 생명력의 나무를 몸으로 표현한다면? 엄청난 폭의 치마를 두른 상체 가녀린 여자 무용수의 벗은 등을 능가할 표현 방법 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 그리고 보이지 않아도 혼자 의연한 그 어떤 내면의 힘을 나타내기엔 벗은 몸에 대비되는 검은색 말고 다른 색의 표현이 있을까? 작품 처음부터 무용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포의 예술적 상징술에 감복했다. 30년 내공의 전문성 그리고 소수의 매니아들만이 그들의 전문성을 알아봤던 지난날을 우직하게 견뎌낸 사포가 21세기 변화된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걸까. 객석은 무용전문인 보다는 문화계 전반에서 이젠 장,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포의 지인들로 메워져 있었다.
각자의 취향을 겨냥한 즐거운 축제의 장소 대신 낯설어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동굴 같은 극장을 선택한 사람들과 마주한 사포가 용기 있게 내보인 신작 『겨울 숲』은 1997년 복합적인 의도에서 서울(문예회관, 현 아르코 대극장)로 공연 장소를 정했던 『겨울 강』(1997)을 기억하게 한다. 그땐 서울이 예술의 중심지였고, 사포는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 중 하나로 공연 장소를 결정했던 시절이었다. 사포 내부적으로는 예술감독 김화숙 교수의 무용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을 독식한 제자 신용숙이 사포의 공연 연습을 예술감독과 일심동체로 맡아했던 때였다.
이제 서른이 된 사포는 자연스럽게 예술정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체현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정신은 그것이 예술정신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들지만, 사람의 의지나 학습에 의해서 계승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사포의 정체성도 지금의 모습을 옛날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사포가 어떤 존재로 그들의 곁에 있으려 하는지에 대한 의지가 사포의 정체성인 동시에 사포의 존재 의미일 것이다.
사포 공연을 보기위해 몇 시간, 몇 일쯤의 시간을 기꺼이 비우고 계획하는 사람들, 비록 처음 만나 낯선 얘기를 접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과 같은 세상을 꿈꾸는 동지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춤으로 말을 걸어온다면 사포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포의 30년은 지나가는 우리의 삶처럼, 그 때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남아있는 것 하나 없는데 그 30년의 시간은 우리의 기억에 도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남아 먼 곳에서 달려가게 만들고 또, 아직도 낯설기만 한 춤으로의 대화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리고 춤추는 이들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치게 만드는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객석의 많은 사람들이 좋은 10월의 하늘과 쾌적한 날씨를 뒤로 하고 자발적으로 동굴의 시간을 선택하는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그렇게 사포의 공연을 보면서 가지려는 사람들의 동지애가 사포에 대한 팬심으로 읽혀지는 건 아닌건지….
그래도 30주년 이 시기에 대표를 맡은 박진경 선생의 무대 위와 무대 밖의 모습에서 선배 없이 애쓰는 것에 마음이 쓰여진 것도 사실이다. 그 무엇도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머무를 수 없듯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포에 존재하고 있을 것을 뻔하게 알면서도 옛날의 사포를 그리워 할 것을 알고 사포는 공연 티켓과 함께 극장에 들어서는 우리에게 30주년 기념 책과 편애의 땅 DVD를 에코백에 담아 손에 들려주었다. 박제된 역사 기록은 집안 어디에 놓여 지겠지만 연지홀 그때 그 시간은 계속 다른 의미를 붙이며 기억을 맴돈다. 이곳이 현장 체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