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이름만 들어도 커피가 생각나는 나라, 코끝에 전해지는 커피향 때문에 온몸이 황금빛으로 물들 것 같은 나라, 뜨거운 열기와 열정 때문에 당장이라도 몸을 흔들어야 할 것만 같은 나라. 바로 ‘콜롬비아’다. 어린이·청소년 예술교육을 위해 콜롬비아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뜻깊은 사업에 동참하게 된 기쁨을 나누고 싶어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들도 나만큼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기쁨도, 축하도 아닌 예상치 못한 반응과 질문이었다.

“범죄·마약의 나라에 가는 기분이 어때?”
“내전 때문에 납치, 테러가 빈번한 곳이니까 교육하러 가서도 항상 조심해야 해!”

마약, 납치, 테러, 내전. 생각지도 않던 단어들이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콜롬비아’를 검색해보니 여행유의 및 여행자제 국가, 내전, 마약밀매, 테러 등의 무시무시한 단어가 인터넷 창을 가득 메웠다.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는데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52년간의 내전, 그리고 평화를 되찾기 위한 노력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콜롬비아는 1964년 5월에 무력충돌이 처음 일어난 이후 52년간 내전이 지속되었다. 사상의 차이로 인해 정부에 대항하여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결성되면서 정부와 우익 민병대-반군간의 분쟁이 시작되었고, 반군이 자금 조달을 위해 마약을 거래하고 인질을 납치하면서 마약밀매, 범죄, 납치, 매춘 등의 문제가 생겨났다. 52년 동안 국민 22만 명이 희생되었고 6백만 명이 실향민이 되었다.
끊이지 않는 갈등 속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이 잇따라 발생하여 정부는 1980년대부터 반군과 평화협상을 진행하였고, 협상과 결렬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2016년 11월 24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콜롬비아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와 단체 또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이번 콜롬비아 예술교육 공헌사업은 이러한 내전의 상황에서 격화된 빈부차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어린이와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발달을 위해 기획되었다. ‘Dance for a peaceful community’ 라는 이름으로 준비된 이 프로젝트는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아시아-이베로아메리카문화재단이 주관하고 트러스트무용단이 진행하였다. 콜롬비아 현지에서는 카르바할 재단과 국립경찰청의 후원과 협력이 있었다.
예술교육은 칼리(Cali)와 부에나벤투라(Buenaventura) 두 지역에서 각각 3일간 이루어졌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한 반에 약 40명의 학생들, 그리고 교사들과 지역 관할 경찰관들이 교육에 참여하였다. 프로그램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신문지, 물, 컵, 천, 콩 주머니 등)를 이용하여 정형화된 춤에서 벗어나 새로운 움직임을 발견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움직임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신체 협응 능력, 창의력, 집중력을 높이고, 공동체 활동을 통해 배려심과 협동심, 연대의식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수업 마지막 날에는 양손에 한삼을 끼고 한국의 민속 춤사위(봉산탈춤)을 직접 체험해보며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예술교육현장 1) 칼리 - 한여름 아지랑이보다 뜨겁게 피어오르는
콜롬비아의 춤을 보여 달라고 하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살사를 추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춤사위 속에는 열정과 노련함이 배어있었고 뜨거운 땀방울 속에는 여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살사 댄서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칼리’에서 예술교육을 하며 만난 학생과 교사, 경찰관들의 이야기다. 칼리는 ‘살사의 본고장’이라고 불릴 만큼 살사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놀랍게도 칼리의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문가와 같은 수준의 살사를 선보이며 자신들이 살아 있는 역사임을 증명하였다.
열정과 자신감은 교육 시간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 보는 동양인의 등장에 함께 사진을 찍으며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 수업이 시작되니 아이들의 눈빛과 움직임은 한여름 아지랑이보다 뜨겁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업 첫째 날에는 신문지를 활용한 움직임을, 둘째 날에는 물과 컵을 활용한 움직임을 경험했다. 셋째 날에는 콩 주머니와 천을 활용한 움직임과 더불어 한국 춤사위를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새로운 움직임을 경험하는 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무척 자유로웠다. 처음 하는 활동임에도 한국에서 온 무용수들보다 더 창의적이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서 때때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특히 둘째 날에는 수업 도구였던 신문지를 사용하지 않고 춤을 추는 시간이 있었는데 부끄러운 내색 없이 가운데로 나와 움직이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프로 무용수 같았다. 3일간 칼리에서 교육을 진행하며 콜롬비아 모든 어린이·청소년들은 ‘당당함, 열정, 자유로움’ 그 자체인 듯했다.

예술교육현장 2) 부에나벤투라 - 어두운 표정 뒤에 감춰진 새하얀 순수함
인사를 건네자 수줍은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몇몇은 무표정, 무반응으로 인사에 답했다. 먼저 다가와 사진을 찍고 재잘재잘 말을 걸던 칼리 아이들과 달리 이곳 아이들은 다소 어둡고 무거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콜롬비아인이라고 하면 모두 ‘당당함, 열정, 자유로움’ DNA를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부에나벤투라’에서의 첫 만남을 통해 지역마다 아이들의 성격도 다름을 느꼈다.
살인율이 뉴욕의 24배이고, 항구를 통한 마약 거래로 수많은 범죄 조직이 활개를 치는 곳. 부에나벤투라는 콜롬비아 안에서도 악명이 높은 지역이다. 길거리는 쓰레기 투성이고 범죄가 빈번한 탓에 집이며 학교 할 것 없이 대부분의 건물은 사방이 방범창으로 막혀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곳이라 부모는 어린 나이의 자녀를 학교 대신 노동 현장으로 보내고, 생계에 뛰어든 아이들은 큰돈을 벌기 위해 마약 밀매와 범죄에 가담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어떤 아이는 얼굴에 길고 깊게 베인 흉터가, 어떤 아이는 팔 곳곳에 자해를 한 듯한 흔적이 있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보였고, 몇몇 아이들은 말을 걸어도 허공을 쳐다보거나 이어폰을 낀 채 자신의 세상에 갇혀 있었다. 아이들을 보며 ‘수업이 잘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에나벤투라에서의 예술교육은 이렇게 첫 문을 열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키지 않는 표정, 소극적이고 위축된 모습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하니 어두운 표정 뒤에 감춰져 있던 새하얀 순수함이 드러났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의 에너지는 칼리의 아이들과 또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 냈고 각자만의 흥으로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이 열린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강사들과 지역 관할 경찰관들에게도 넘치는 애정과 사랑을 주었다. 먼 나라에서 온 강사들은 처음 보는 이방인이니 낯설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지역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관들까지도 경계하던 이들이었다. 친근한 모습의 한국 경찰과는 달리, 부에나벤투라의 경찰은 ‘무섭고 두려운’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업을 하면서 어떤 아이는 우리의 등에 업혀 내려올 줄을 몰랐고, 어떤 아이는 만날 때마다 목에 매달려 뽀뽀를 퍼부었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수업에 임하기 전,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매일 내 머리를 따 주었다. 이것은 부에나벤투라 아이들만의 사랑, 정(情), 순수함이었다.
부에나벤투라에서 3일간의 수업을 마치고 4일째 되는 날에는 한국 대사와 지역 관계자, 예술교육 담당자, 타학교 학생들을 초청하여 그동안 진행했던 교육 활동을 공연 형식으로 발표했다. 부에나벤투라 아이들만의 순수하고 명랑한 움직임은 관객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 감동은 공연이 끝난 후 뜨거운 박수갈채로 이어졌다. 첫 만남에서 내가 느꼈던 걱정, 그리고 아이들이 가졌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이별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몇 번이고 서로를 껴안았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 - 예술교육을 마치며
칼리와 부에나벤투라 지역의 예술교육을 모두 마친 후, 수도 보고타에서는 내전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시아-이베로아메리카문화재단, 한국국제교류재단, 콜롬비아 국립경찰청, 주 콜롬비아 대한민국대사관이 행사를 주관하였고, 내전으로 인한 희생자 가족들과 현지 경찰, 정부 관계자 등이 초청되어 콜롬비아의 평화를 기원하였다. 오케스트라, 성악,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 다채로운 공연들은 인터넷을 통해 콜롬비아 전역으로 생중계 되었다. 이 행사에서 트러스트무용단은 화해와 평화, 자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보고타 공연을 끝으로 콜롬비아의 예술교육 공헌사업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남미의 뜨거운 날씨 때문에 예술교육 기간 동안 땀방울이 미끄럼틀 타듯 흐르곤 했는데 한국에 도착하니 매서운 칼바람이 두 뺨을 치며 나를 환영했다. 익숙하고 차가운 11월이었다. 그제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콜롬비아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이 실감났다.
2016년 11월, 대륙과 계절, 언어와 문화, 낯섦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콜롬비아 아이들과 웃고 춤추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이 2주의 시간은 무용단 구성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꿈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아시아-이베로아메리카 문화재단, 카르바할재단, 콜롬비아 현지 경찰 분들의 공이 컸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콜롬비아에서 돌아온 지 2달이 지났다. 오늘도 무용단 식구들은 스페인어로 인사를 하고 콜롬비아의 음식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의 피가 흐르던 칼리의 아이들을, 정이 많던 장난꾸러기 부에나벤투라의 아이들을 그리워한다. ‘콜롬비아’라는 나라는 나에게 더이상 ‘커피향이 날 것 같은 나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나라, 사람 냄새가 나는 나라, 꼭 다시 가고 싶은 나라’다. 내 생애 가장 따뜻했던 11월을 보내고 온 지금, 아이들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재회할 수 있기를, 다시 함께 춤추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