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근래 들어 무용가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공연예술 중에서도 특히 무용은 대중성이 떨어져서 마땅한 수입원이 없는 반면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무용가들이 자생적으로 창작활동을 펼쳐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술관련 지원기관들의 창작지원프로그램은 무용가들의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창작산실」은 무용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창작지원프로그램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직접 집행하고 관리하는데다가 무엇보다도 다른 지원프로그램에 비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매년 「창작산실」에 대한 무용가들의 시선이 뜨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산실」은 우수공연 자생력 확보와 대표 레퍼토리 육성을 목적으로, 창작에서 유통까지 공연제작의 전 과정을 지원하는 창작지원프로그램이다. 2011년 발레에서 시작되어 2013년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으로까지 확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6년 「창작산실」 무용분야는 11월17일부터 12월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총 여덟 팀이 창작신작을 발표하였다. 공연 순으로 살펴보자면 대극장 무대는 서울발레시어터와 윤수미무용단이 그리고 소극장 무대는 나인티나인아트컴퍼니, 콜렉티브콜라보레이션, PDPC, 신현지, 오!마이라이프무브먼트시어터, 고블린파티가 장식하였다.

2016년 「창작산실」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11월17~18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서울발레시어터의 『시집가는 날』이었다. 원작은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1943)로 그동안 여러 장르에서 작품화되어 왔다가 이번에 창작발레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맹진사댁 딸과 혼인하게 된 김판서댁 아들이 절름발이인 것처럼 속임으로써 일어나는 우여곡절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는 신분제도와 구습혼례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담겨져 있다.
제임스 전은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극적 전개보다는 일련의 주제를 춤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강점을 지닌 안무가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국적인 소재보다는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소재를 추구해왔다. 따라서 『시집가는 날』은 여러모로 도전이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의 이야기를 서양에서 탄생하고 발전한 발레동작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퓨전이듯, 음악은 국악과 양악의 선율을 섞어서 연주하며 의상은 한복과 드레스를 융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창작발레극이라고 한다면 동작에 기교와 표현을 적절하게 버무려야함에도, 단순한 율동이나 제스처를 반복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11월29~30일 윤수미무용단의 『귀신고래』는 남도 암각화에 새겨진 멸종위기의 귀신고래를 모티브로 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춤으로 그린다. 『귀신고래』는 첫 장면부터 영상, 무대장치, 조명 같은 시각효과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를테면 영상의 점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있다가 점차 모여서 귀신고래의 윤곽을 띤다.
안무 역시 다채로운 동작 구성을 보이면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한다. 때론 원형의 정돈된 대열을 통해 기원의 의식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국무용의 기본에 현대적인 감각을 융해한 춤에 있어서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밀도가 약했다는 것이다. 춤추는 몸의 밀도를 좀 더 높였더라면 작품력이 한층 상승했을지도 모른다.
『귀신고래』는 한국무용가 윤수미와 연출가 이재환을 필두로 영상, 무대장치, 조명, 소품, 의상, 음악 분야 예술가들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각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 융합을 통해서만 완성도 높은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귀신고래』는 상당히 성공적이다.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공연은 11월18~19일 나인티나인아트컴퍼니의 『침묵』이 문을 열었다. 『침묵』은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서 영감을 얻은 『숨그네』와 『심연』에 이은 연작이다. 마음 속 진실을 삼킨 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동시대적인(컨템포러리한) 감각의 한국창작무용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말라위에서 온 흑인여성 엘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진솔하게 내뱉는 가운데, 일곱 명의 여성무용수는 끊임없이 현 상황을 자문하면서 때론 저항하는 움직임을 전개한다. 그녀들은 기본 동작을 집요하리만큼 발전시켜나간다. 강약, 장단, 시간차, 대열변화 등을 통해서 말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이를 탄탄하게 발전시켜가는 안무 스타일은 긍정적인 성과를 낳기 마련이다.
장혜림은 최근 무섭게 상승세를 타고 있는 창작자다. 한국무용계에서 동시대적인(컨템포러리한) 창작을 제대로 실현하는 젊은 창작자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1월23~24일 콜렉티브콜라보레이션의 『음형공간-Atopos』는 현대무용가 박소정과 영화감독 최종태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아토포스(atopos)는 ‘어딘가에 속하기도 하고 또 어디에서는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작과 함께 영상이 35분 내외로 상당히 오래 제시된다. 여러 시각이미지와 함께 무용수들을 비추고 있는데 그리 새롭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기는 힘들다. 다원적인 작품에서 핵심은 전문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상호작용인데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대에 부응하고 있진 않다. 같은 맥락에서 철학적인 소재에 대한 실현 역시 모호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11월26~27일 PDPC의 『당신의 바닥』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다는 주제를 실제적인 탐구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피지컬한 움직임으로 실현한다.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인간과 유유자적 일광욕을 즐기는 가식적인 인간이 한 공간에 제시되는 가운데, 전자와 후자의 극명했던 차이가 서로 마주하는 동안 무뎌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둘의 심리적인 입장과 영향력이 반전되기도 한다.
김관지, 김유정, 진다운, 안영진으로 이루어진 출연진은 각자 개성있는 역할에 충실하면서 모두 함께 피지컬한 동작을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창작자 안영준이 움직임 조작에 연연했던 침체기를 벗어나, 견고한 구성적 틀 안에 특유의 피지컬한 동작을 심어놓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제2의 전성기를 여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11월30일~12월1일에는 신현지가 온라인에 숨어 소통하는 인간들과 그 관계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중앙을 가로질러 W를 거꾸로 놓은 형태의 흰 막이 설치되어 있다. 그 위에 영상이 투영되기도 하며 중앙의 V자형 막이 뒤로 이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막은 자연스럽게 무용수들의 동선을 평범치 않게 만들었다. 국내 발레안무가로서는 드물게 장치 활용에 대한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발레의 기본 테크닉에 충실하면서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연결성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인(컨템포러리한) 창작에 대한 접근을 느낄 수 있다. 주제와 장치에 어울리는 창의적인 동작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더욱 요구되는 바다.

12월3~4일 오!마이라이프무브먼트시어터의 『공상 물리적 춤』(영상)은 몸의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몸의 가능성에서 대해 탐구한다.
무대에는 거대박스인형, 경운기, 애드벌룬, 광선검, 여행용가방, 선풍기, 훌라후프 그리고 갖가지 장난감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잡다한 소품이지만 거대박스인형처럼 공간에서 크기(size)가 주는 시각적인 착시와 왜곡을 상징하는 기재도 있다. 음향은 클래식, 록, 라틴뮤직, 사운드 등을 융해하여 의미심장하면서도 감각적인 선율과 리듬과 소리를 만들어냈다. 안무적인 창의성과 집중력도 돋보인다. 생활 속 행위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뻔한 패턴을 배제한 채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된 움직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공상 물리적 춤』은 현시대의 감각과 묵직한 예술성이 결합되었을 때 얼마만큼 흥미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춤, 음악, 장치의 콜라보레이션이 시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재능있는 안무가로 인정받았던 밝넝쿨이 오랜 기간의 침체를 딛고 얼마큼 높이 비상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작품이다.

12월8~9일 고블린파티의 『옛날 옛적에』는 우리 전통을 작금의 방식과 개인의 감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옛날의 여러 생활모습이나 전래동화를 끌어와서 재창조하듯 상투와 갓, 두루마기와 한삼, 바지와 대님, 버선, 부채 같은 의상과 소품을 새롭게 배치하여 활용하였다. 전통적인 풍자와 해학을 현대적이고도 개별적인 유머와 재치로 변환해 놓은 몸짓 또한 흥미롭다.
임진호, 지경민, 이경구의 공동창작이긴 하나 독특한 움직임과 기발한 유머코드에서는 올해 들어 창작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이경구의 지분이 높아 보인다. 장면마다 집요한 탐구와 본능적 감각을 함양하고 있듯, 예술적 수준과 대중적 수용력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점이 경쟁력이다.

전년도에 작품성에 있어 저공비행을 하던 「창작산실」이 올해 의미있게 회생하였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특히 창작의 심정지 상태에 놓인 낀 세대 무용가들이 침체를 딛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대표주자로 밝넝쿨과 안영준을 꼽을 수 있다. 최근 창작력이 급상승하고 있는 장혜림과 고블린파티 같은 신진무용가들에게 기회를 준 점 역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중견무용가 윤수미의 경우에도 이번 「창작산실」을 통해 자신의 창작활동에서 정점을 이룰만한 작품을 내놓았다. 이와 같이 볼 때 「창작산실」이 추구하는 목적은 본질적이고도 다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작산실」은 우수작품제작지원으로 그치는 않고 우수작품재공연지원처럼 연계된 지원프로그램까지 마련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창작산실」을 통해 발표된 신작들 중에서 뽑아서 지원을 해주다가 올해부터 지원 대상을 무용계 전체로 열어두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작품에 한해서 지역 곳곳을 순회 공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넘치도록 많은 무용공연이 펼쳐지는 중앙에 비해, 지역은 수준을 갖춘 무용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다. 침체일로에서 선 지역무용의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프로그램은 고려되어야 한다.(※ 본 리뷰는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무용부문 총평으로 협의 하에 수록함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