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이동원&정수동 안무의 『하객들』(12월8~9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객석과 무대가 한 평면이다. 객석은 무대를 ‘ㄷ’자로 에워쌌다. 공연이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무용수들이 무대에 나와 있다. 경쾌한 캐주얼 정장 차림이다. 더러는 관객을 맞아 안내하고 더러는 객석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경호원처럼 서 있다. 때때로 오가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고 손을 부딪친다. 관객은 자리에 놓인 일회용 접시를 집어 들고 하객이 된다. 결혼식이 시작된다. 사회자는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목소리와 축하음악은 끊김과 하울링으로 잡음처럼 멀어진다. 무심하게 서 있던 무용수들이 느닷없이 춤을 춘다. 비트가 강한 아프리카풍 음악에 수초가 일렁이듯 하나로 신명나게 너울댄다. 둘씩 또는 서넛으로 나뉘어 뛰고 흔들고 돈다.
갑자기 춤과 음악이 멈춘다. 무용수들은 시간이 정지한 듯 꼼짝을 않는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맨발로 걸어 나와 예리한 눈빛으로 그들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마법에 걸린 듯 숨겼던 속내를 드러낸다. 귓속말이 생쥐처럼 오가고 반목과 질시가 엉겨 붙는다. 굳게 뭉쳐 있던 그들은 바늘이 꽂힌 얼음처럼 서서히 쪼개지고 갈라진다. 여유 없이 종종걸음 치고 서로 밀쳐낸다. 음악에 얹힌 랩은 이 상황을 “정신적인 고통에….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라고 묘사한다. 욕설과 비명 속에 드잡이로 해가 뜨고 진다. 최후의 승자가 가려진다. 그 역시 상처투성이다. 승리를 만끽하기 무섭게 쓰러진 패배자들 위로 고꾸라진다.
다시 현실이다. 식사시간이다. 무용수들이 관객들에게 일일이 과자를 나눠 준다. 스무 명 가까운 무용수들이 접시를 들고 열을 지어 선다. 박자에 맞춰 접시를 한 손으로 받아 다른 손으로 옆 사람에게 넘긴다. 접시를 주고받는 몸짓이 왈츠를 추듯 흥겹고 일사불란하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은빛 단 위에 빨간색 옷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 세상을 싸움판으로 만든 그 남자가 다가가 머리에 종이 봉지를 씌우더니 액체를 한참 분사한다. 여자를 눕히면서 종이 봉지를 얼굴에서 벗겨낸다. 여자의 몸 아래 겹쳐 누웠다가 일어난다. 마네킹처럼 굳어진 여자를 뒤에서 안아 들고는 천천히 걸어 나온다.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듯 남녀 관계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여자들은 남자의 눈을 가리고 혀로 “쭈쭈” 소리를 내며 강아지 어르듯 남자들을 부른다. 남자들은 네 발로 긴다. “손”하면 손을 내밀고 “점프”하면 뛰어 오른다. “빵” 소리에 쓰러진다. 어느덧 남자들은 여자들 없이도 혼자 구령을 외치고 동작을 취한다. 남자는 조건반사적으로 욕망을 좇고 여자는 역이용한다. 음산한 음악이 뱀처럼 기어든다. 험상궂은 남자가 다시 여자의 얼굴에 봉지를 씌운 뒤 안아 들고 나간다. 여자들의 춤사위는 우아하지만 거북스럽다. 남자들의 몸짓은 거칠고 일방적이다. 미움의 가시가 돋친 듯 남자가 붙잡으면 여자는 뿌리친다. 가까워졌다가도 등을 돌리고 안겼다가도 발버둥 친다. 남자들은 여자를 가두고 질질 끌고 다니며 학대한다.
침묵이 흐른다.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허허로운 공중에 손을 뻗어 길을 묻는다. 허공을 천천히 만지고 느낀다. 다툼도 잃음도 빼앗음도 없다. 텅 비어서가 아니라 그런 게 없어서 허공임을 안다. 손으로 착실히 공기를 쥐고 훑어보면서 허공이 사랑임을 터득한다. 감각을 되찾은 손을 서로 맞대고 부딪쳐 본다. 상대가 허공을 닮았음을 비로소 알아챈다. 상대의 어깨에, 머리에 손을 천천히 손을 얹는다. 마침내 사람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사랑이 사랑을 꼭 껴안는다. 무용수들이 무대로 이끈 관객들도 곧 하나가 된다. 모두가 신랑 신부요 자축하는 하객이다. 말이 없던 허공에선 영원한 축복의 플래시가 연거푸 터진다.

■ 공영선 안무의 『도깨비가 나타났다』(12월29~3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가운데 지름 7m 남짓한 원이 형광색으로 빛난다. 춤판이다. 반딧불 수만 마리가 내려앉은 듯 은은하고 신비롭다. 그 중심에 책가방만한 바윗돌이 바닥을 짓누르듯 놓여 있다. 관객들이 무대 위로 오른다. 원 밖으로 스펀지 방석과 종이 받침대들이 두 줄로 빙 둘러져 있다. 객석이다. 무대 밖 빈 의자들은 공연을 관람하듯 꼿꼿이 앉아 이쪽을 노려본다. 바닥이 흰색으로 바뀌자 여자 둘 남자 한 명이 들어선다. 남자는 트레이닝 바지에 터틀넥 스웨터, 한 여자는 반 팔 티셔츠에 반바지, 다른 여자는 허름한 바지에 라운드 티를 입었다. 편한 차림새다. 무용수와 관객이 닿을 듯 가깝다. 눈높이와 차림새의 차별이 없다. 도깨비는 아직 안 보인다.
셋이 팔을 맞잡고 버티며 균형을 잡는다. 옆으로 누워 발로 바닥을 밀어 내며 이동한다. 함께라면 버티다가도 혼자로는 무너지는 삶의 중력이 춤판에 음각된다. 무언가를 쫓아 숨 가쁘게 달음박질친다. 그러다 그렇게 뛰지 않아도 되는 무엇이 있는 듯, 한 곳을 응시한다. 걸음을 크게 내디디며 바닥을 세게 구르고 손바닥에 나뭇가지를 수직으로 얹어 놓고 뒤뚱거린다. 온 몸으로 나를 주장하지만 합당한 응답이 없다. 무너져 내린다. 엎드려 무릎과 이마에 체중을 얹는다. 또 죽어라 뛴다. 감정이 움트기 전 몸의 움직임만을 잡아낸 듯 셋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동작은 일상의 잔가지를 쳐내고 줄기를 뽑아낸 듯 간결하다. ‘도깨비는 도대체 언제 나타난다는 말인가?’
안개가 스민다. 새소리, 귀뚜라미 소리, 개 짖는 소리에 날이 잠들고 깬다. 각박하던 동작이 느긋해졌다. 머리 위에 나뭇가지를 얹고도 바위를 뛰어넘고 사뿐 사뿐 걷고, 또 엎드려 몸을 늘인다. 무한궤도처럼 서로 몸을 번갈아 짚고 밟으며 힘겹게 넘어가면서도 의지하고 뭉친다. 서로 팔목을 잡고 버티다 소매를 확 잡아당기며 흩어진다. 윗옷이 벗겨져 속옷과 상체가 드러난다. 위선의 허물을 벗겨낸 것처럼 몸짓이 한결 가벼워진다. 남자는 추켜올려진 옷이 얼굴을 뒤덮었는데도 주눅이 들지 않고 움직임을 즐긴다. 시간이 무르익었다는 듯 셋은 “5, 4, 3, 2, 1”하고 외친다. 사이키 조명이 켜지고 클럽음악이 벼락같이 터져 나온다. ‘도깨비가 왔나보다.’
남자가 피리를 바닥에 대고 세게 굴린다. 셋은 피리를 물고 ‘옹달샘’을 쉴 새 없이 연주하며 돈다.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가운데 붙박여 있던 걸림돌을 번쩍 들어낸다. 바닥에선 큐브퍼즐, 솔방울, 조개, 동물 미니어처 같은 장난감이 무더기로 드러난다. 여자는 큐브퍼즐을 들어 한참 만에 맞춰낸다. 장난감을 도미노처럼 여러 가닥 열을 지어 늘어놓는다. 또 다른 여자는 ‘옹달샘’을 부르며 돌고 구른다. 천진난만하다. 한 명이 장난감 총을 쏘아 둘을 쓰러뜨린 뒤 자신도 바닥에 눕는다. 불이 꺼졌다가 켜진다. 셋은 반딧불과 노닐 듯 아주 천천히 공중에서 뭔가를 집어낸다. 허공에서 답을 찾은 듯 평화롭다. ‘도깨비 녀석 한바탕 잘 노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