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살롱

아프리카에 의료지원 및 기생충 박멸 사업 담당자로 파견되었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장비 사용이었다. 기생충을 진단하고 감별하는 대부분의 장비들은 전기로 작동한다. 전기 없는 곳이 없는 한국의 실험실에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수도와 전기 보급률이 낮은 빈곤 지역에서는 이렇게 간단한 것조차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구형 현미경에는 햇빛을 반사해서 조명을 비출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세부 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혈액에서 적혈구와 백혈구, 혈장을 분리해 기생충만 검출해 내거나, 간단히 빈혈을 진단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 역시 가장 작은 장비가 수십만 원을 넘어섰다. 빈곤 지역에서는 이러한 걸림돌들이 하나씩 쌓여나가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적정 기술’이라 부른다. 대표적으로 종이 현미경과 종이 원심분리기가 있다. 종이 현미경은 렌즈를 넣고 종이 접기처럼 접으면 손쉽게 저배율 현미경을 만들 수 있으며, 가격은 약 500원에 불과하다. 종이 원심분리기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요요와 비슷한 장난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는데, 역시 가격은 200원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단순한 적정기술의 사례도 있다. 한때 전세계에서 350만 명 이상의 감염자를 일으키던 메디나충은 길이 약 1m 가량의 기생충으로, 우물에 사는 물벼룩을 식수와 함께 사람이 먹게 되며 감염된다. 초기에는 별 다른 증상을 일으키지 않지만,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발목이나 발등에 커다란 물집을 일으키며 빠져나온다. 전체 기생충이 빠져 나오는데 약 1~2주의 시간이 걸리며 이 동안 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심한 경우 상처 부위 감염 때문에 다리를 절단하는 경우도 생긴다. 1990년대부터 적극적인 박멸 노력이 있었고 현재 감염자는 연간 100명 미만에 불과하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주 간단한 기술의 적용이었다. 상하수도 보급률이 낮고, 심지어 사막 지역으로 땔감이 부족해 물을 끓이기 쉽지 않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은 매개체인 물벼룩을 물리적으로 식수에서 제거해 내는 것이었다. 식수를 물통에 담아가기 전에 뚜껑에 나일론 천을 씌우고 물을 한번 걸러 담게 사람들을 설득했다. 아주 간단하고 저렴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이러한 기술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메니나충 감염 사례도 따라서 낮아졌다.
하지만 적정기술에도 한계는 있다. 자원의 한계, 특히 자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인만큼, 자본집약적인 기술보다는 노동집약적 기술이 많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적 발전은 전기, 수도, 연구소 등 충분한 사회기반시설을 통해 좋은 장비를 통해 지역에서 필요한 과학 연구를 해당 지역의 연구자들이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장기적인 연구 역량 강화를 전제로 하지 않은, 적정기술은 지역 내 전반적인 기술의 하향평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기술 뿐 아니라 ‘기준’들을 도입할 때 지역의 문화와 경제, 정치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항상 있어왔다. 물론 그것이 전반적인 질적 저하로 이어져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