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1923년 간토(關東·도쿄와 요코하마)에 대지진이 났을 때, 일본 정부는 흉흉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리지요. “조센진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고 불을 놓았다”고. 일본 경찰과 자경대들은 재일 조선인들을 보이는 족족 총으로 쏴 죽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지요. 정부의 계략은 성공을 거두었지요. 정부를 향했던 성난 민심의 화살을 재일 조선인으로 무사히 돌렸으니 말입니다. 당시 육천 명이 넘는 재일 조선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때 시인 이상화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광란의 현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자경대에 붙잡혀 죽을 뻔했지요.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 조선으로 탈출한 뒤 그가 발표한 시가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입니다. 관동대학살이 낳은 아픈 산물이지요. 일제의 만행 그중에서도 관동대학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시이지요.
그런데 이 관동대학살 이후 조선인들의 심금을 울린 노래가 하나 더 있습니다. 홍난파가 작곡하고 김형준이 작사한 가곡 「봉선화」입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 「봉선화」 전문

관동대학살이 일어나고 한 해, 두 해가 지났을까 아무튼 그 무렵 시인 김형준이 친구 홍난파가 1920년에 만든 바이올린 곡 「애수」를 듣고 시를 쓰지요. 그렇게 세상에 나온 가곡이 바로 「봉선화」입니다. 1940년대 이 노래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는 김천애라는 성악가인데, 이 노래를 부르다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지요. 당연히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고요. 그래서 그런가요.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단체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졌던 동경의 아라카와 강변에 조선인 학살 추모비를 세우고 봉선화를 심기도 했지요. 이렇듯 우리 민족에게 봉선화에는 조국을 잃은 슬픔이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한편 봉선화는 남북분단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사연도 있지요. 한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이를 위해 의술을 펼친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 박사에게 봉선화는 이산의 아픔, 북에 두고 온 엄마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3남 3녀 중 둘째였던 장기려 선생은 1950년 피란길에 엇갈려 아버지와 단 둘이 남쪽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북에 남게 되었다지요. 평생을 그리워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어느 날 미국 친척을 통해 보내온 소포 꾸러미. 그 안에 사진과 봉선화 씨앗, 그리고 어머니가 부른 노래 녹음 테이프가 있었는데, 어릴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불러주었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봉선화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망국의 설움과 이산의 아픔을 지닌 봉선화입니다. 물론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봉선화가 설움과 아픔보다는 사랑의 노래가 되기도 하지요. 현철의 「봉선화 연정」처럼 말입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더 이상 참지 못할 그리움을 가슴 깊이 물들이고
수줍은 너의 고백에 내 가슴이 뜨거워
터지는 화산처럼 막을 수 없는 봉선화 연정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더 이상 참지 못할 외로움에 젖은 가슴 태우네
울면서 혼자 울면서 사랑한다 말해도
무정한 너는 너는 알지 못하네

봉선화 연정
봉선화 연정
- 현철 노래, 「봉선화」 전문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이 가사는 사실 굉장히 사실적인 표현이지요. 봉선화는 정말로 조금만 건드려도 씨앗이 투둑 터져버리거든요. 손대면 정말로 톡 하고 터지거든요. 터진 씨앗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봉선화 같은 여자.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만 같은 여자.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만 같은 사랑. 그러니 봉선화 연정. 참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봉선화 하면 생각나는 건 뭐니뭐니 해도 어린 누이가 손톱에 봉숭아, 그 붉은 물을 들이던 추억일 테지요.(봉숭아는 봉선화의 우리말 이름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네 누이들이 봉숭아로 손톱을 물들였더랬지요. 정태춘이 작곡하고 박은옥이 작사하여 둘이 듀엣으로 부른 노래 「봉숭아」는 그런 봉숭아 물들이던 누이들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지요.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꽃.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 꽃물을 들이는 누이들. 봉선화의 꽃말을 두고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하기도 하고 ‘소녀의 순정’이라고도 하나 봅니다.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 정태춘 작곡, 박은옥 작사, 「봉숭아」 전문

봉숭아물들이기. 누구나 한번쯤 해봤거나 누구나 한번쯤 그 모습 보았을 텐데요. 봉선화 꽃잎을 따서 백반과 함께 돌이나 그릇에 찧어 열 손가락 손톱에 붙인 뒤 헝겊으로 싸고 무명실로 꽁꽁 감았다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헝겊을 떼어보면 봉선화꽃 붉은 빛깔이 손톱에 물듭니다. 예로부터 붉은 색이 악귀를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를 지녔는데, 봉선화로 손톱을 물들이는 것도 그런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뱀을 쫓기 위해 집 주변에 봉숭아꽃을 심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봉숭아물들인 손톱에 첫눈을 맞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장안의 소문들이 퍼졌지요. 세월이 지날수록 제법 그럴 듯하게 포장이 되어 제가 어릴 때만해도, 11월까지 기다렸다가 봉선화꽃 이제 다 질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그예 봉숭아물들이던 누이들도 참 많았더랬지요.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줄 알았던 누이들의 어여쁜 꾀였더랬지요. 지금은 그 풍경이 조금은 낯설어진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만 노래로 남아서, 시로 남아서,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붉게 물들이는 꽃. 봉선화이지요.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 도종환, 「봉숭아」 전문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며
一生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결한 一生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
-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전문

올해는 텃밭에 봉선화를 좀 심어야겠습니다. 봄날 싹이 돋으면 아내와 두 딸 데리고 가서 넷이서 쪼그리고 앉아, “이 꽃이 붉게 피면 내가 봉숭아 물들여주마”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붉은 꽃 활짝 핀 어느 날 정말로 꽃잎 한 움큼 따다가 아내와 두 딸 서른 개의 손톱에 서른 개의 붉은 물을 들여주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