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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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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마!
- 백 세 시인 그리고 음치 디바 할머니들로부터의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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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바람과 햇살이
몸은 어때?
마당이라도 걸으면 어때?
살며시 말을 걸어옵니다.
힘을 내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영차’하며 일어섭니다.
- 시바타 도요, 「바람과 햇살이」
칼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 속에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이 시의 작가는 시바타 도요(1911~2013)라는 일본 할머니다. 92살인 2003년부터 일상의 소소함을 시로 담기 시작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평소 취미로 하던 일본 춤을 고령으로 불가능해지자 시인인 아들 켄이치 씨가 92세의 노모에게 시 쓰기를 권유하면서 할머니의 인생은 90대부터 새로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100세를 눈앞에 둔 사람이 쓴 인생에 대한 소감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달, 이 춤산책 코너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느꼈던 감정에 대한 글을 읽으신 많은 분들이 위로를 해주셨다. 사실, 정기 세미나 준비, 행사가 끝나자마자 치르게 된 장례식 그리고 아버지께서 유언하셨던 호국원으로의 이장 등 두어 달이 속절없이 지나가다보니 원고마감일이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급한 김에 넋두리처럼 주저리주저리 썼던 것이 나의 착오였다. 겉으론 평온 한 척 하다가 뒤에 가서 무너져 버린 모습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부끄럽기도 하고, 시간만 있으면 좀 더 보완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써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구차하지만 변명을 해본다.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아프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무덤덤할 줄 알았다. 임종을 지키면서도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관 예배 때 나도 모르게 참았던 감정들이 복받쳐 올라 제어할 수 없이 오랫동안 울었다. 마치 방언이 터지듯 나 자신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정말 많이 울었다. 통곡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는지, 그동안 내 자신의 감정의 상태가 어땠는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또 그동안 ‘괜찮아, 괜찮아’를 반복하며 내 감정을 얼마나 속이며 억누르고 살았는지를 말이다. 한순간에 무너진 순간에 아내가 없었다면 어디서 나의 서러움을 위로를 받았을까. 한말의 눈물을 쏟아내고도 그래도 아직 눈물이 남았는지 발인 때 버스 밑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후 많은 분들이 따뜻한 마음을 담아 위로를 해주셔서 그나마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 짓지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마.
- 시바타 도요, 「약해지지마」
아버지를 여의고 받은 위로 문자를 통해서 이 할머니의 시를 알게 되었다. 당시 할머니의 시집이 나오자 일본의 독자들의 반응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금 간병 중인데, 용기를 얻었다” 는 메시지가 매일같이 수십 통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후 동일본 지진 때는 급작스런 불행을 겪은 이재민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들을 보면 시 (詩)라기 보다는 일본 전통문학의 장르인 하이쿠(俳句)나 단가(短歌) 모음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시를 쓴다는 심적 부담감을 느끼지 않은 채 훨씬 더 자유롭게 글을 써 내려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기 때문에 관망자의 관점에서 진솔하게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춤을 추는 분들은 한결같이 젊었을 땐 예쁘게 잘 추기위해 몸에 힘을 주고 추지만, 나이가 들수록 몸에 힘을 빼고 몸이 움직여 주는 범위 내에서 욕심 없이 추게 된다고들 말한다. 시바타 할머니의 시가 보통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연륜이 오래됨에 따라 변해가는 춤의 깊이처럼, 아이처럼 힘을 빼고 욕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2013년, 시바타 할머니는 도치기 현에 있는 자택 부근의 요양원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과 이별했다고 한다. 두 편의 시집을 내고 자신의 글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했던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그러나 어린 시절 집안의 몰락과 더불어 겪은 고단한 삶과 이혼 등으로 나름 굴곡진 인생역정을 겪었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그리고 한국전쟁 등을 겪은 우리네 할머니들보다야 나은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을 해보지만,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 시바타 할머니의 인생을 개인적으로 상대평가 할 수는 없을 것 이다.
향년 102세의 나이로 별세 했지만 꾸준히 이어나간 취미생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매일같이 외모를 단장하고 언제나 여자로서 예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세상을 향한 왕성한 호기심등이 늘 생기 있고 미소를 짓게 만드는 시적 영감의 도구였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반대편인 미국에서 태어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1868~1944)는 인생의 중반기에 노래로 미국 사람들을 아주 즐겁게 만들었던,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실화의 주인공이다. 어릴 적부터 플로렌스는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즐겨서 주위 사람은 그녀를 “리틀 미스 포스터(Little Miss Foster)”라고 불렀다고 한다. 특히 피아노에 재능이 많아서 심지어 백악관에서도 연주를 했을 정도였다. 유럽에 건너가 좀 더 피아노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18세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악몽이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통해 옮은 성병으로 인해 결혼생활이 신혼 초반에 끝장난 것이다.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 의료 수준 때문에 치료 방법은 대단히 위험했다. 당시 매독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용된 수은과 비소는 엎친데 덮친격으로 피아노를 치던 플로렌스의 한 쪽 손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심지어는 이 무시무시한 약물치료가 그녀의 ‘청각이나 정신적 착란까지로도 번졌을 것’이라는 추측성 후문도 생겨났다.
이혼 후, 플로렌스는 줄곧 살았던 펜실베이니아 생활을 정리하고 뉴욕으로 이사 가면서 제2의 인생을 맞게 되었다. 남편이 준 위자료 그리고 곧 이은 부친의 사망으로 받은 유산으로 부유한 삶을 살게 되면서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태우게 됐는데, 이번엔 피아노가 아니라 노래에 대한 도전이었다.
40살이면 전문 성악가라도 은퇴할 수 있는 나이에 성악 트레이닝을 시작한 플로렌스는 부유한 재력으로 토스카니니 등 당시의 유명 음악인들과도 교류가 있었기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부지휘자였던 카를로 에드워즈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속 반주자까지 고용하면서 자신이 직접 디자인 한 과장스러운 무대의상과 함께 대중에게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노래실력이 엉망이었다는 데 있었다. 단지 성악가가 되기에는 늦은 나이어서가 아니었다. 음치는 아니지만 자신이 자기 소리를 못 듣나 할 정도로 음정이 불완전한 것은 기본이요, 숨을 쉬는 곳도 틀리고 목소리는 고음으로 치달을 때마다 갈라지고 있어 관객 대부분이 플로렌스의 상류층 지인들이라 예의상 대놓고 웃지도 못하고 공연 내내 웃음을 참느라 곤혹스러웠던 것이었다. 이 정도가 되면 주위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도 남았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형편없는 노래 실력은 중독성이 있어서인지 그녀의 연주회를 거의 빼놓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게 중에는 당시 유명 뮤지컬 작곡가인 콜 포터도 있었으며, 그 외 저명인사들도 그녀의 연주회에 기꺼이 참석했었다. 급기야 그녀는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누어줄 요량으로 음반을 취입했는데 라디오 음악코너 청취자들의 신청 음반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고무된 플로렌스는 급기야 1944년 10월25일, 할머니가 된 나이 76세에 카네홀을 전세를 내서 개인 콘서트를 개최했다.
표는 전석 매진되었으며, 관객 중에는 그녀의 변함없는 관객인 콜 포터는 물론, 현대 오페라 작곡가였던 잔 카를로 메노티 그리고 당대의 오페라의 디바 릴리 폰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표를 구하지 못해 입장하지 못하고 돌아간 인원만 해도 잠정집계 2천여 명이었다고 하니, 준 음치 아마추어 콘서트로써 음악 역사에 전무후무 한 대성공이었던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꿈을 좌절시키려는 환경 그리고 주위의 질시에 굴하지 않고 자기 꿈을 오롯이 펼쳐나간 그 의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편없는 실력을 통해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던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할머니는 콘서트를 개최한 지 딱 한 달 하고도 하루 만에 별세했다. 평생에 육체적 고통을 주었던 남편의 성을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았으며 사망 후에는 음악을 그녀의 꿈을 좌절시킨 아버지의 곁에 묻혔다.
제3자의 눈으로 볼 땐, 딸의 재능과 꿈을 망친 아버지와 난잡한 사생활로 성병에 걸린 박사출신의 남편을 두었던 플로렌스 할머니를 음악적 기행을 통해 이러한 백인 상류층의 위선을 풍자를 한 도발적인 인물이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가진 재산, 그리고 없는 재능까지 끌어다가 비록 일부였지만 재미있는 세상을 만든 넓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녀를 괴롭힌 것은 노래실력만 가지고 비난한 음악 평론가들 뿐이었다.
가끔 기술적인 측면만 가지고 호불호를 가리는 평론이 잘 된 것인지, 무엇을 위해 인간은 예술을 하며, 왜 예술을 찾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큰 웃음을 선사한 것에 대한 평가를 테크닉으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오히려 세상을 더욱 삭막하게 만드는 것 같다.
보통 매독에 걸리면 20년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플로렌스 할머니는 60여 년을 살다 갔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음악에 대한 애정이 병을 견뎌냈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보상심리 차원의 행각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음악을 중심으로 한 사교모임인 베르디 클럽을 운영해왔으며,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에 나간 미국 군인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최근 뉴스를 장식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의 위선이 드러나도 거짓과 비 양심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화가 나다가도 ‘어차피 사람은 다 빈손으로 가는데’라고 결론을 낸다. 그렇다 누구나 다 죽는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풍요롭게 만든 이들은 자신은 물론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든다.
쉼 없이 정진하며 노력하는 삶에는 인생의 황혼이란 없는 것 같다. 뒤늦게 문자로 알게 된 시바타 도요 할머니나 영화를 통해 알게된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할머니나 바다 건너 한국에 있는 나에게 때로는 잔잔한 위로로, 때로는 요절복통 할 만한 큰 웃음으로, 장밋빛 인생이 올 날을 기다리기 보다는 장미 같은 사람이 되면 인생도 장밋빛으로 변화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내가 꾸준히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은 나를 어떤 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고 남들과 공유를 할 수 있고 또 내가 글을 통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글을 쓰며 결국 나 자신을 가꿀 수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리고 평론가로서의 나 역시 좀 더 인간적이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봐야겠다. 내가 작다고 느껴질 때, 이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때, 100세가 되어서도 글을 쓰고 멋을 부릴 줄 알았던 시바타 할머니의 인생 시나 음악에 대한 애정 하나로 모든 고통을 견뎌낸 플로렌스 할머니가 남긴 음반을 들으며 나 자신을 격려해본다. “약해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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