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국립발레단 「백 투 더 퓨처」(2월1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을 보고 나서 며칠 후 이번 무대에 작품 『흉터』를 올린 송정빈과 출연 무용수 정지영, 변성완과 저녁 모임을 하는 자리에서 송정빈에게 안무 설명을 부탁했다. 사랑이 마음먹은 대로 이어져가지 않다가 아프게 헤어지게 될 수 있다는 걸 표현하려 했다는 설명. 그래, 그건 나도 보면서 공감한 것이었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깍지 낀 두 손을 돌리는 무용수의 동작은 사랑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이야기. 그런 거였어? 그런데 설명을 듣지 않고 그렇게 해석해낸 사람들이 있을까?
문득, 처음 발레를 접했을 때가 다시 기억난다. 10년 전 갈라 공연에서 김지영이 추었던 『빈사의 백조』. 막연히 유럽 사람들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발레를 한국 발레리나가 표현하는 것을 처음 보았고, 그때 느꼈던 놀라움과 감동을 다시 떠올리며 무용수들의 하나하나 동작의 의미를 읽고 분석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확인하며 되도록 공연 중 내가 가졌던 느낌과 감동을 옮겨본다.

무브먼트 시리즈
이번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무대는 작년, 재작년 두 차례 기획된 「KNB 무브먼트(KNB Movement)」 무대에서 발표된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창작 안무 작품들 중 일부를 다시 모아 꾸민 무대이다. 첫날은 다른 일정으로 보지 못했고, 둘째 날 일요일 오후에 소풍 가는 마음으로 세 작품을 보았다.
강수진 단장이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하고 작품기획의 방향 등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무브먼트」 무대의 기획은 정말 박수를 받을 만하다. 안무에 욕심이 있었던 단원들에게 재능을 발휘할 장이 만들어졌고, 무용수로서의 삶에 막연히 불안감을 느끼던 단원들에게는 아티스트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원들은 그동안 이미 짜여진 틀 안에서 반복된 동작을 먼저 연습하고 거기에 표현을 입혀가는 과정을 거듭해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자기들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와 감정을 정하고 나서, 안무를 짜내고 그 위에 빛(조명)과 색(무대)을 어떻게 어우를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기성 작품들을 감상할 때와는 달리, 관객들도 안무가들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각각의 작품들
■ 박나리는 일제강점기를 겪어낸 우리 민족의 한 섞인 정서를 춤으로 풀어 내고자 『오감도』의 안무를 만들었다. 길지 않은 공연시간인데, 군무와 독무, 그리고 소품을 이용한 퍼포먼스가 다채롭고 유연하게 연결되어 있다. 테크닉이 단단한 김하림, 김명규, 허서명이 잘 표현해주었고, 특히 안무가인 언니 박나리와 주역인 동생 박슬기의 호흡이 독무에서 빛을 발했다. 음악과 조명, 의상도 적절하다. 그래서 가슴을 조이는 긴장감이 계속 이어지고, 안무가의 의도대로 ‘한’을 눈과 귀로 느끼게 한다. 행복감 주는 환한 웃음이 끊이지 않아서 늘 사랑받고 살았을 것 같은 박나리가 어떻게 이런 안무를 하였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 송정빈의 설명처럼 『흉터』는 젊은 날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온전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안무가와 무용수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이 겪었던 사랑과 이별을 표현했다는데, 단순한 주제와 분명한 표현 때문에 모두가 겪은 아픈 이별 이야기로 연출이 된 듯하다. 내 젊은 날의 어느 하루가 머리를 스쳐가기도 했다. 장식이 없는 단출한 무대였고 단순한 조명이었지만, 그래서 두 무용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더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늘 조금은 아련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해왔던 정지영을 다시 보게 된 무대. 정지영에게 저런 힘과 표현이 있었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 박슬기의 『콰르텟 오브 더 소울(Quartet of the Soul)』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으로 이어진다. 탱고 음악에 나오는 각각의 악기를 무용수들이 각자의 몸으로 표현한다. 오선지를 연상케 하는 조명 때문에 무용수들은 악기가 되었다가 때로 음표가 되기도 한다. 현악기를 표현한 안무에 특히 공감이 갔는데, 자신의 춤을 가장 잘 아는 안무가는 첼로를 표현하면서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몸을 움직였고, 박나리의 작품 때와 마찬가지로 경탄의 한숨을 자아내었다.

글을 마치면서
아무래도 국립발레단 후원자 중 한 사람으로서 단원들이 직접 안무한 작품들에 대해 감상평을 쓰려다 보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좋은 얘기들을 늘어놓게 되었다.
굳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단원들이 스스로 안무를 짜고 친한 동료들과 작업을 하다 보니 각각의 무용수들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안무로 구성하여 작품의 흐름이 유려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뒤집어 생각하면, 너무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배려하여 모험을 하지 않게 되는 면이 있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앞으로도 「무브먼트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서 우리 발레의 발전에 기여해 나가길 기대해본다. 지금은 클래식 발레보다는 현대 발레 쪽에 치중한 안무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어느 정도 클래식 발레 안무도 곁들여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회를 거듭하면서, 더 많은 단원들에게 동기부여가 될 것이고, 이들 중 본인의 스타일을 꾸준히 추구하여 한국 토양에서 길러진 세계적 안무가들이 곧 나오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