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국립발레단 「백 투 더 퓨처」(2월1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맨 앞줄의 객석은 불편하다.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관객의 눈빛이 거쳐 갈 거라는 착각 때문이다. 얼굴이 굳어진다. 무대 위 누군가와 눈 마주치기가 부담스럽다. 관객이라는 익명의 숲에서 삐져나와 무방비로 벌판에 선 기분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대 위에서 예술감독과 안무자들이 나와 대담한다. 발레 소품 4편의 안무의도를 묻고 답한다. 예술감독이 “어때요 훌륭하죠?”라고 관객을 향해 물을 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언제 시선이 달려들지 몰라 불안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눈길은 줄곧 위쪽 객석에 머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앞자리가 안전지대다. 이젠 설명이 친절하고 정겹다. 맨 앞자리가 문득 호젓하다.

박나리 안무의 『오감도』
“이상의 시를 보니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과 불안이 느껴졌어요. 우리도 때때로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안무자 박나리) 여자는 공중에 매달린 짚 인형의 목에 붉고 긴 스카프를 두른다. 인형이 사라지자 여자가 무너져 내린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아해’들이 가는 빛줄기를 좇아 달리다 벽에 부딪쳐 넘어지고 깨진다. 애달픈 창(唱)이 가녀린 발레 동작을 쓰다듬는다. 힘을 얻은 몸짓은 사물놀이 장단으로 분노를 두드리고 담금질해 희망을 벼린다. 여자의 절절한 몸짓에 거치적대던 겉옷이 벗겨진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듯 황금색 천이 수직으로 드리워진다. 붙잡는 손길이 애틋하다.

송정빈 안무의 『흉터』
“류시화의 시(옹이) 한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흉터라 부르지 마라 다만 열정이 지나쳐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였으니’…”(안무자 송정빈) 남녀가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힌다. 여자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가 다가와 여자를 살포시 안는다. 둘은 어우러지고 스케일을 오르내리는 피아노 선율이 그들을 애무한다. 감싸 안으며 서로에게 기쁘게 갇힌다. 언제부터인지 미움의 싹이 튼다. 냉정하게 뿌리친다. 미련을 못 버리고 달려가 부둥켜안는다. 여자는 나지막한 흐느낌을 정표로 남기고 떠난다.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사랑과 미움을 오가며 응어리진 정념이 금강석처럼 빛난다.

박슬기 안무의 『콰르텟 오브 더 소울(Quartet of the soul)』
“발레에서 동작이 다 되면 음악을 입히는 식으로 작업하는데 ‘음악 선율에 맞춰서 무용이 들어가는 건 어떨까?’ 악기를 몸으로 표현해 보자….”(안무자 박슬기) 남자 둘, 여자 둘 네 명의 몸짓이 악기를 표현한다. 클라리넷과 피아노, 그리고 첼로와 바이올린 선율을 몸짓으로 그려낸다. “지휘자는 조명으로 연출했어요.” 건반 모양의 빛이 무대를 비추자 무용수가 건반 위의 손가락처럼 힘차고 흥겹게 움직인다. 한 줄기 빛이 비출 땐 첼로와 바이올린 소리가 미끈하고 가는 몸짓으로 너울댄다. 동그란 빛 속에선 클라리넷 소리가 몽글몽글 몸짓으로 피어난다. 소리와 몸짓은 색색의 선과 도형으로 무대를 수놓는다.

신무섭 안무의 『카르멘』
“연예인 하리수를 보고 트랜스젠더에 관한 작품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가 카르멘 역할을 하고 에스카미유는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설정했습니다.”(안무자 신무섭) 카르멘의 매무새가 기괴하다. 빨간색 원피스 아래로 울끈불끈 튼실한 다리가 함부로 드러나 있다. 화장은 들떴고 머리는 짧게 깎은 그대로다. 돈 호세는 그런 카르멘에 빠져든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에스카미유가 아찔한 관능미와 넘치는 카리스마로 돈 호세를 낚아챈다. 카르멘의 양성적인 춤사위는 놀라웠고 에스카미유의 몸짓은 황홀했다. 그러나 성을 바꿔 비튼 스토리가 다소 길었고 따라가기 버거웠다. 그 때문에 일품의 춤사위를 간간이 놓쳐 아쉽다.

■ 「차세대열전 2016!」 허윤경 안무의 『스페이스 쉽(Space-ship)』 (1월25~26일 문화역서울284RTO)
건물은 낡았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옛 서울역사다. 공연장에 우주선은 없었다. 미군 열차수송사무소(RTO)로 쓰던 데란다. 더블백 맨 미군장병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벽과 천장을 헐어내 휑하다. 로비와 공연장 사이의 벽체와 창만 그대로다. 바닥은 무수한 발걸음에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다. 관객들이 모여들자 황량했던 공간이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다.
흰옷 입은 무용수가 벌써 로비에 나와 유영하듯 움직인다. 안내 직원이 “티켓에 스마일 도장 찍힌 분들!” 하고 불러 모은다. 다섯 명씩 모아 로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는 공연장에 입장시킨다. 객석은 따로 없다. 무용수는 서 있는 관객의 코앞에서 춤춘다.
발밑으로 무용수가 바닥에 등을 댄 채 물고기처럼 미끄러진다. 물방울 소리가 에코를 타고 공간을 적신다. 또 다른 한 명은 무릎을 땅에 대고 옆으로 이동한다. 팔을 벌리고 일어나더니 손으로 벽을 문댄다. 눈보라에 묻힌 된바람 소리가 들린다. 무대 반대 쪽에서도 느린 화면처럼 걷다가 바닥을 구른다. 기둥을 타고 올라 손으로 잡고 옆으로 걷듯 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연신 뭔가를 집어 입에 넣고는 먹는 시늉을 한다. 생명이 진화한 연대기를 표현하듯 수평에서 시작한 동작이 수직으로 곧추선다. 무용수는 “움푹 팬 곳의 크기와 깊이는 다양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행성이다”라고 지형정찰 결과를 보고한다.
혼자였던 사람들이 섞이기 시작한다. 5명이 함께 손을 들며 호흡을 맞춘다. 한 쪽 다리로 서서 중심을 잡는다. 태극권 자세를 취한다. 오리걸음을 하며 뒤뚱거린다. 시계소리에 몸을 떨다 로봇처럼 수동태로 움직인다. 기계음이 들리자 무당벌레처럼 드러누워 뺑그르르 돈다. 관객 사이를 뛰어 다니고 밖으로도 뛰쳐나간다. 제자리에서 뛰고 뒤로도 뛴다. 쓰러져 발을 구르고 뒤꿈치로 서려다 중심을 잃는다. 고통은 남과 나를 비교하교 따지는 데서 온다는 듯 “너무 의식하지 마.”라고 누군가가 위로한다. “자연스런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나와 남이 하나로 스미고 통한다면 두렵거나 괴로울 게 없다고 타이른다.
이제 움직이는 법을 알았다는 듯 벽에 몸을 편안히 기댄다. 장난치듯 기둥을 타고 오른다. 끊겼던 무전 음이 들려온다. 파도가 달려와 박수를 친다. 마지막 남은 에고가 악을 쓰며 버티지만 금세 쓰러진다. 그때 “멈춰 있는 순간은 몸이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라고 자연합일의 비결을 일러준다. 커튼 속으로 들어가 천진하게 춤춘다. 어깨춤에 문워크며 개다리 춤까지 환희심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부족함 없이 먹고 마시고 인어가 돼 이상향을 누빈다. 서로 몸을 딛고 짚고 넘어간다. 질서 있게 뒤엉켜 사는 세상이 더없이 살갑다. “공간을 자유롭게 둘러보세요.” 관객은 어느덧 우주선이 돼 시방(十方)1)으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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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방(十方): 불교에서의 우주에 대한 공간적인 구분.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의 사유(四維)와, 상·하의 열 가지 방향. 시간 구분인 삼세(三世)와 통칭하여 전 우주를 가리킨다.(출처: 원불교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