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차세대열전 2016!」 손나예 안무의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나』(2월10~11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공연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팸플릿은 책과 종이더미의 정글로 사라지고, 기억도 실종되었다. 몇 가지 단서를 찾아서 추적을 시작한다. 기억은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올라 올 것이다. 내 기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연자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궁시럭 거리다 딱 떠오른 것은 이 공연을 본 후 스스로 던진 질문이었다 - ‘이 무대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
그날도 여전히 바람이 매서웠다. 날은 추웠고 서강대 정문을 지나 오르는 언덕길엔 인적이 없었다. 메리홀 로비에 북적거리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실내로 피난 온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좌석으로 이동하다 보니 무대 위에 한 여자가 금속 막대들을 세우고 흰줄로 묶어서 연결하고 있다. 공연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입장 시키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저 여성은 공연 중인가, 아닌가. 그렇게 의심하게 만든 건 그 사람의 너무나도 일상적인 동작과 의상 때문이었다. 작업하는 동작이 너무나 평범해서 의도된 동작이라 보기 힘들었고(무대 조감독 같았다),
또 하나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옷 때문이었다. 보통 실내복으로 분류 될 만한 것인데 잘 봐줘서 동네 편의점까지 진출 가능한 옷. 데이트 불가능한 옷. 춤추기에도 그다지 용이해 보이지 않는 니트에 바지. 색상은 존재감 없는 살색. 무라카미 류가 자신의 소설에 뉴욕의 노숙자를 등장시켜 한 말은 의상에 관한 것이었다. 보웨리의 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저 화려한 클럽에 못 들어가는 단 한 가지 이유가 뭔지 아나, 바로 패션때문이지.”
현대춤이 특정계층에게 아부하고 오락 거리가 되는 춤을 거부하고 댄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 테마로 삼았다고 본다면 화려하고 희한한 의상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지금까지 현대춤의 의상이란 별다른 패션을 추구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타이즈류 연습복 같은 것을 입기도 했고 해방, 날것, 억압, 욕망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내기도 하다가 이제는 올 누드로 나체를 드러내는 것이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아닌 것이다. 요즘은 패션디자이너들과 협업으로 주제에 맞는 의상을 제작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고 본 공연에서 보듯 일상복으로 춤추는 것도 트렌드. 하지만 벗는 것 보다 입는다는 것은 돈이 무척 많이 드는 일. 안무가가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의상을 제작하려면 전체 예산의 반 이상을 쏟아 부어야 할지도 모른다. 소프라노 가수가 리사이틀을 할 때도 옷값이 제일 큰 몫. 이래저래 작가의 고민은 많아진다. 입을 것인가, 벗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

빌둥스 탄츠(Bildungs Tanz)?
객석에 입장이 정리되고 관객석에 불이 꺼지고 무대에 라이트 온. 무대 왼편 앞쪽에서 나름 설치 작업을 하던 여성이 정색을 하고 댄스를 시작한다. 자기가 설치한 막대와 막대를 연결한 흰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막대와 흰 줄은 중앙에 사각의 닫힌 공간을 만들고 무대를 사선으로 분리 시켰는데, 문득 저 무대가 작가의 머릿속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반짝거리는 쇠막대기는 머릿속의 빠지지 않는 고정관념, 흰 줄 역시 나를 가두고 제어하는 경계선. 댄서는 줄 사이를 피해 움직였지만 막힌 공간이다.
세 명의 댄서가 무대로 들어온다. 누가 봐도 첫 번째 댄서의 분신이랄 수밖에 없는, 같은 의상의 세 명이다. 각자 위치를 잡는다. 한 명은 사각의 막힌 공간, 제대로 춤출 수 없다. 괴로워하고 몸부림친다. 나머지 두 명은 흰줄의 반대편에서 각자 움직인다. 줄을 사이에 두고 만나기도 하고 갇힌 댄서를 위로하기도 한다. 첫째 댄서는 다른 댄서를 지켜보기도 하고 뛰어들어 어울리기고 하고 조율하기도 한다. 관객은 지켜보는 그를 지켜본다. 댄서들은 안무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습득한 것으로 보였다. 서로 밀고 당기며 공간을 내어주는 폼이 아마도 수년간 호흡을 맞춰온 듯 보였다. 그중 한 명의 춤은 특히 파워풀하고 볼륨감이 있었다. 이제 충분히 무르익고 긴장은 폭발점에 다다른다. 줄은 풀려 길게 꼬리를 감추고 막대도 사라진다.
텅 빈 공간에 거울벽이 나타난다. 병풍처럼 제작된 거울벽인데 거울도 되고 문으로 열리기도 한다. 이 바퀴달린 설치물 2개조가 무대에 등장한다. 댄서들은 두 줄의 거울병풍을 맞대어 길게 펴놓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면서 문처럼 들락날락 거리기도 하고 거울을 뒤집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거울벽의 위치와 조명의 합이 중요해서 거울 문을 끌거나 열거나 들어올릴 때 무대를 때리던 강한 조명이 객석으로 반사되는데 깜짝 놀랄 정도의 강한 빛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댄서가 거울문을 통과해서 지나갈 때나 벽을 이동시킬 때면 어김없이 빛이 쏘아져 깜짝 놀라게 했다.
이때쯤 되면 의문이 드는 것이다. 제목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나’인데, 도대체 ‘무엇’이 시작됐다는 것인가. 무엇이. 번쩍 거리는 조명의 반사광 속에서 무엇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이제 거울병풍 두 개가 또아리를 틀고 4명의 댄서 역시 거울사이로 사라지고 다시 한 번 조명이 폭발하며 끝이 났다. 전반적 무대사용은 무대 왼편 앞에서 시작하여 점점 사선으로 중심이 옮아가서 무대 오른쪽 뒤편에서 종결되었다.
의도를 가진 것인지 궁금하다. 굳이 그림으로 간추리자면 한 명이 네 명이 되었다가 다시 빛으로 폭발하며 다시 하나가 된 것. 혹자는 모든 소설은 성장소설(Bildungs Roman)이라 했는데, 이것은 빌둥스 탄츠(Bildungs Tanz) 아닐까. 소설이든 영화든 관통하는 테마를 갖고 있는 것인데, 나열해보면 사랑 질투 집념 배신 등등. 본 공연의 테마는 개인의 내적 성장과 포매이션으로 보이니 빌둥스 탄츠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질문하는 자는 대충 답을 알고 있는 법.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나 하고 질문한 작가는 자기의 질문과 답을 춤으로 보여주고, 관객에게 무엇이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것인가.

이대로냐, 아니냐
‘투 비 오아 낫 투 비(to be , or not to be)’ 는 인간의 영원한 문제. 햄릿을, 셰익스피어를 불멸로 만들고 있는 명대사.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외고 있고 누구나의 인생에서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세 번째 데이트에 저 하얀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전 재산을 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목숨을 건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고전은 항상 새로 번역되어야 하는 바, ‘to be, or not to be’의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발간하며 고심 끝에 내놓은 번역이다.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 창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펭귄클래식

어떤 번역이 마음에 들지는 각자의 몫. 우리는 매일 햄릿이 되어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변주곡을 외운다. 공연 후 눈에 남아 되새김질 되는 것은 살색 바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도리어 눈에 밟히는 것인가. 살색바지를 계속 ‘입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