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언론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책을 공짜로 받아 읽었다. 일종의 특혜를 누린 셈인데, 출판 담당을 하던 한 선배는 “난 ‘드림 출판사’가 제일 좋아”라며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신문 제작용으로 제공되는 책에는 으레 ‘드림’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 초기에는 한 권에 수 만 원 하는 증정 도서가 이 법에 위배되는지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루에 많으면 십여 권이 넘게 도착하는 책들 중에서 어떤 기준으로 서평거리를 고르느냐,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름 기준이 몇 가지 있는데 번역서라면 옮긴이의 말을 먼저 보는 것이다. 좋은 번역자는 첫 번째 독자로서 그 책의 진가를 소화해 들려준다. 필자, 번역자, 서평자, 독자는 모두 어떤 공감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받은 책 가운데 옮긴이의 말에 뭉클했던 것이 「보이는 것과의 대화」(열화당)다. 프랑스의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철학자였던 르네 위그(1905~1997)가 1955년 쓴 대작으로 7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의 첫 페이지는 이런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또다시 미술에 대해 써야 하는가? 더 나아가, 도대체 왜 미술에 대해 써야 하는가?” 박학다식 같은 상투적인 단어로는 그 면모를 다 표현할 길이 없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두고두고 읽어야 할 숙제가 생겼다 싶었는데 옮긴이인 곽광수 전 서울대 불어교육과 교수가 쓴 이 도서의 탄생 비화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인연일까.
오래 전 곽 교수는 알맞은 역자를 소개해달라는 이기웅 열화당 대표에게 강거배(1943~ 1998) 당시 서강대 교수를 추천했다. 강 교수는 학교 선배이자 기자로서 좋아하는 화가 강요배 씨의 친형이다. 19년 전 1월 어느 날, 강 교수의 부음을 듣던 순간의 놀람이 지금도 생생하다. 등반길에 올랐던 그가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들꽃과 들풀을 사랑하고, 고향 제주도에 내려가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싶어 했던 그의 꿈을 아는 지인들은 황망함 속에 한라산 밑에 고인을 묻었다. 번역에 손도 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를 대신해 곽 교수는 은퇴한 뒤 몇 년에 걸쳐 이 고전에 매달렸고 마침내 빛을 보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르네 위그는 그림을 영혼의 현상(現象)이라 했다. 그림의 근원에는 싸우고 있는 화가의 영혼이 있으니, 그림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는 화가의 내적인 빛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이미지는 어떻게 우리에게 말을 거는가’인 까닭이다. 문득 강요배 화가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제주 땅이 지닌 상처와 먼저 간 혈육의 영혼이 건네는 이야기들을 그는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지는 우리 영혼에 새겨진 억겁 인연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