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마흔 살도 훌쩍 넘은 후배가 늦장가를 들어서 모처럼 예식장을 찾았더랬습니다. 도둑장가는 싫었는지 청첩을 보내왔더군요. 그렇다 해도 신부가 이제 서른을 갓 넘겼으니, 도둑은 도둑인 셈이지요. 실은 후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닙니다. 신부가 들고 있던 부케 얘기를 하려던 건데 딴 데로 샜습니다. 결혼식에 빠지지 않는 행사 중 하나가 바로 신부의 부케 던지기.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으면 조만간 결혼을 하게 된다는 속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결혼식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지요. 그날도 으레 부케 던지기가 진행되었고, 시끌벅적하게 꽃을 던지고 받는 것으로 결혼식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부케를 받은 친구는 조만간 결혼을 하게 될까요? 아무튼 그 친구가 받은 부케 꽃이 바로 아스틸베(Astilbe)인데요. 우리말로는 노루오줌이라는 꽃입니다. 오래전부터 식용으로 약용으로 쓰인 노루오줌이 이제는 결혼식 부케용으로 쓰이고 있으니 꽃도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런 고약한 이름만 아니었다면
눈 제대로 맞추지 않았을 꽃,
제 이름을 숨기고 너스레를 떤다

사관생도 모자 깃털을 꽂고
하늘거리는 꽃술
연홍의 싱그러움이 꼼실대지만

나는 알고 있다
뿌리에 노루오줌 냄새를 숨겨둔 것을,
그러나 짐짓 눈감아 준다

꽃빛이 농익은 지금

고운 입술 한껏 사르며
기약 없는 사랑을 쪼고 있다

이름 갖고 따지는 것에 동의할지 말지를 두고
흔들리는 채
‘노루 제 방귀에 놀라듯’

나는
저 내음을 매달고 허허로운 들판을 휑하니 달린다
- 류병구, 「노루오줌꽃 」 전문

노루오줌, 꽃 이름 치고 참 거시기 하지요? 예로부터 노루가 잘 다니는 산에 피는 야생화인데, 그 뿌리와 꽃에서 지린내, 노루오줌 냄새가 난다고 해서 노루오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요. 사실 노루오줌이 지린내를 풍기는 것은 스컹크가 냄새를 피우듯 나름 생존의 방편인 셈일 텐데요. 이 얘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기로 하겠습니다.
류병구 시인의 「노루오줌꽃」을 보면 사실 노루오줌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나오지요. 노루오줌 냄새가 난다는 것. 그 꽃의 색깔이 연홍이며 그 모양이 사관생도 모자 깃털처럼 생겼다는 것.
노루오줌은 산에 다니다 보면 흔히 만나게 되는 그런 꽃입니다만, 사실 그 꽃의 실제 모양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냥 겉으로 보이는 노루오줌은 사실 꽃이 아니라 꽃의 다발, 꽃의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서 하나의 다발을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전문

나태주 시인의 짧은 시, 「풀꽃」을 기억하실런지요. 워낙 유명한 시라 대부분 아실 텐데요. 사실 자세히 보아야, 오래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노루오줌입니다. 사관생도 모자 깃털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물의 꼬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노루오줌을 제대로 보려면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오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꽃의 다발 속에, 꽃의 무리 속에 부끄러운 듯 제 고운 얼굴을 숨긴 한 송이 한 송이 그 작은 꽃들. 그 한 송이의 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얼마나 고운지요! 마치 아기 진달래요 아기 영산홍이지요. 겉 다르고 속 다른 꽃.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노루오줌이 보여주지요.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손주의 고추를 잡고 가로수 밑에서 오줌을 뉜다 마음처럼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지 쉬-,쉬-, 하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

화장실에 갔다가 오줌이 나오질 않아 머쓱해질 때가 있다 시가 반짝 떠올라 책상 앞에 앉았는데 한 구절도 씌어지지 않아 애를 태울 때가 많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

무슨 주술처럼 시-,시-, 아뜩한 기억 저편에서 노루오줌꽃이 터져나오듯 망울망울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주며 따로 노는 몸과 마음을 한데 이어주는 소리
- 손택수 「오줌 뉘는 소리」 전문

꽃이나 풀에 오줌이라는 이름이 붙는 경우가 제법 있지요. 노루오줌을 비롯해서 쥐오줌, 여우오줌 그리고 닭의 오줌이라는 뜻의 계요등(鷄尿藤) 등등. 왜 오줌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풀들이 이 꽃들이 지린내를 풍기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왜 이 식물들은 고약한 지린내를 풍기는 것일까요.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천적인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쓰였을 가능성입니다. 스컹크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멧돼지를 비롯한 초식동물들이 싫어하는 지린내를 풍겨서 감히 곁에 얼씬 못 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지린내라는 게 곤충에게는 향기로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사실 활짝 핀 노루오줌마다 벌과 나비들이 몰려드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사람을 비롯한 포유류에게는 지독한 냄새일지 모르지만 벌과 나비 같은 곤충들에게는 달콤한 향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이 식물들의 지린내는 ‘보호와 유혹’ 두 가지 수단으로 쓰이는 게 아닐까. 일거양득인 셈이지요.
한편, 노루오줌이라는 말이 주는 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노루 제 방귀에 놀라듯’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노루라는 동물은 겁이 많지요. 대개 초식동물들이 겁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노루는 무척 경계심이 강한 동물이지요. 언제 어디서든 사주경계를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 겁 많은 노루가 오줌을 눌 때를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평생 시원하게 오줌을 눌 수 없지 않을까. 오줌을 눌 때조차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은 사방을 경계하고, 그러다 인기척이라도 느껴지면 오줌을 누다 말고 도망을 치겠구나. 그런 생각에 미치면 이 노루라는 동물이 얼마나 가여운지요! 아가 괜찮다 할미가 망을 봐줄 테니 편안하게 누거라. 오냐 오냐 쉬-,쉬-, 오줌을 뉘어 주고 싶어지지 않는지요. 할미에게 손자는 언제나 겁 많은 노루가 아닐까요. 손택수 시인의 「오줌 뉘는 소리」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오늘만큼은 예쁜 연애시 하나 쓰겠노라 펜을 든 것인데

노라조 노라조, 아빠는 놀아줄 수가 없단다 밥 벌러 나가야 한단다 도은이는 혼자 논다 노라조 노라조 노래를 부른다, 오늘도 늦어요 또 늦어요? 내일도 늦을 거다 여보 모레도 늦을 거다 아내는 오늘도 혼자 잔다 마른 잠을 알약처럼 삼킨다, 아픈 데는 없니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없어요 엄마 위궤양이 어디 병인가요 역류성 식도염은 병도 아니잖아요 30년 전 아버지가 건넌 강이잖아요 울음의 강을 아버지도 무사히 건너셨잖아요,

라고 썼다, 밤새 지우고

아버지 자꾸만 오줌이 마려워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꾸만 오줌이 마려워요,

노루오줌 같은 문장 하나 겨우 지리고 마는 것인데
- 박제영, 「연애시」 전문

언젠가 썼던 졸시입니다. 이 또한 겁 먹은 노루, 겁 많은 노루가 오줌을 누다 말고 인기척에 도망을 치고, 그 자리에 노루오줌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더랬지요. 어느날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거기 노루오줌 같은 중년의 한 사내가 커다랗고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