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관무기

*김보라 안무의 『인공낙원』(3월24~2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어두운 무대 한 복판에서 시퍼런 빛줄기가 뻗어 나온다. 객석을 노려보는 빛살이 날카롭다. 굴삭기 모양을 한 50cm 높이의 로봇이 광선을 뿜어댄다. 빛은 무고한 관객들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 꼼꼼히 비춘다. 그러다 스스로 바퀴를 굴려 무대 구석구석을 탐조한다. 움직일 때마다 나는 기계음은 높고 거칠다. 로봇은 과거에 입력된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 기계는 과거에 머리를 둬 생명이 없고 비정하다. 로봇이 무대를 샅샅이 훑고 나서야 무용수 9명이 나와 자리를 잡는다. 기계는 관객을 다시 어둠 속에 풀어 주고는 퇴장한다. 기계가 물러난 자리에 비로소 생명이 흐른다. 숨 쉬는 존재들의 몸짓이 시작된다.
9명 가운데 7명은 서고 한 명은 앉았으며 다른 한 명은 누워 있다. 생활 속 군상의 비율 그대로다. 각각 혼잣말 같은 동작을 이어간다. 주저앉으려다 일어서고 몸을 비틀고 유영하듯 천천히 걷는다. 무릎 꿇고 엎드려 등을 둥글게 말았다 펴며 고양이 자세로 긴다. 대형 선풍기가 내뿜는 강풍에 사내의 상체가 뒤로 젖혀진다. 쏟아진 생수가 손에 닿자 “악!”하고 비명을 지른다. 여자의 머리를 꼬거나 말아 쥔다. 다 같이 입을 크게 벌렸다 오므리며 박자에 맞춰 쩝쩝 소리를 낸다. 과장되지 않은 동작이다. 일상의 동작과 닮았다. 그러나 맥락을 말로 짚어내기는 어렵다. 머릿속에선 알 수 없는 느낌만 아른거린다.
춤의 시제는 현재다. 몸짓의 좌표는 ‘여기’다. 무용수는 여기를 딛고 지금을 춤춘다. 찰나를 살다 가니 붙잡아 둘 수 없어 애틋하다. 춤을 호위하는 빛과 소리도 마찬가지다. 지나간 몸짓은 돌이킬 수 없다. 놓친 빛과 소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지나간 것은 기억일 뿐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용수들은 자주 눕거나 엎드린다. 정지 동작에서도 몸은 쉴 새 없이 진동하고 미세하게 물결친다. 생명이 담긴 몸짓은 가만히 있어도 춤이다. 춤엔 쉼표가 없다. 우주와 같이 성실하다. 이어지는 ‘지금’의 몸짓은 영원에 닿아 있다. 한정된 말이 아니라서 크고 깊다. 무대엔 ‘지금, 여기’의 물결이 굽이쳐 흐른다.
무용수와 관객은 춤 속에서 ‘지금, 여기’ 머문다. 과거를 되짚거나 미래로 앞서갔다간 춤은 멀리 달아난다. 춤을 보면 과거로 돌아가 휘청대지 않는다. 미래로 지레 달려 가 걱정하지 않는다. 그 잘난 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따지고 드는 순간 춤은 사라진다. 춤을 온전히 보고 느끼면 과거나 미래는 원래 ‘없음’으로 돌아간다. 가슴엔 미묘한 흥취가 춤사위를 따라 일렁인다. 무대를 숨차게 내딛던 무용수가 거꾸로 매달린 나뭇가지 사이에 멈춰 선다. 말없는 말을 하듯 묘한 표정으로 객석을 바라본다. 뻐꾸기시계가 미소 짓듯 ‘뻐꾹’하고 ’지금’을 점찍는다. 과거로 숨거나 미래로 덧칠하지 않고 ‘지금’을 춤추는 ‘여기’가 낙원이다.

*김남진 안무의 『무게』(3월25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공연시작부터 섬뜩하다. 젊은 남자 무용수 8명의 복장 때문이다. 넥타이 없는 흰 와이셔츠에 검정색 바지 차림이다. 통일된 엄숙함과 가난한 개성이 일렬횡대로 객석을 향해 서 있었다. 손에는 이력서인 듯 A4용지 한 장씩 들려 있다. 그들은 생동과 희망을 거세당한 채 분노에 찬 절박함을 움켜쥐고 서 있다. 윗도리와 아랫도리엔 피도 눈물도 없는 흑백의 이분법이 아로새겨 있다. 잔혹한 승자 독식의 폭력성이 스며 있다. 옷깃마다 너무 많이 가진 소수와 너무 없이 사는 다수의 거친 숨결이 부딪쳐 물결친다. 순결과 능력을 상징하며 곧고 순해야 할 복장이 창백한 좌절과 검은 침묵으로 구겨져 있었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친 여자 나타난다. 청년들 손에 쥔 이력서를 낚아채서는 한쪽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비꼰다. “이놈은 S대 출신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놉니다.” “얘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집에서 놉니다.” 연애, 결혼, 취업 포기를 뜻하는 ‘삼포’를 넘어 뭘 해도 안 된다는 N포 세대의 자존심을 가차 없이 짓뭉갠다. 그들의 몸짓은 혹독한 세상을 닮아 거칠다. 서로 앞서 가려 붙잡고 제치고 어깨를 맞대고 겨룬다. 발밑에 깔린 사람을 타고 넘는다. 밀리면 죽는다는 투다. 격렬한 음악조차 사나운 몸짓에 압도당한다. 너나없이 지쳐 바닥에 눕는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눈앞에 세워진 네모난 ‘파이(몫)’ 때문이다.
정사각형을 위, 아랫면으로 하는 직육면체의 파이가 무대 복판에 깔린다. 청년들은 그 위에 올라 뒤엉켜 경련한다. 모두 파이 밖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순간 공중에서 같은 복장의 마네킹이 툭 떨어진다. 중력의 속도로 위협하듯 떨어져 파이를 독차지한다. 폭력적인 ‘낙하산’이다. 스피커는 잡음에 뒤섞인 남자의 목소리로 “나는 어디로 가는가? 어디를 향하는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며 탄식한다. 세상은 평범한 삶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포기를 강요당한 젊음은 괴롭다. 금속성 물체를 든 청년들이 박자에 맞춰 바닥을 긋고 두드린다. 청춘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두드리고 긋는 소리가 드세다.
직육면체 ‘파이’가 일곱 조각으로 갈라진다. 크기는 제 각각이다. 한 명 빼곤 전원이 조각을 하나씩 차지한다. 빼앗길세라 주먹을 치켜들고 남의 접근을 막는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친 여자가 꿈을 묻는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자 “잘해라. 나도 그런 언니를 알았고, 말 잘 타는 딸도 있지”라고 너스레를 떤다. “무용가가 꿈”이라는 청년에겐 “돈 되는 걸 해라. 돈도 권력이야”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무용가 지망생의 꿈은 올곧고 뜻은 가파르다. 사람들은 달려들어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파이 조각을 쌓아놓고는 밀고 끈다. 그는 파이 더미 꼭대기에 올라앉아 허구에 찬 논리에 귀를 막는다. 무대는 그의 열정으로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