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국립현대무용단 안성수 안무의 『혼합』(3월24~26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작년 12월 국립현대무용단이 새 수장을 맞이하였다. 안성수는 그동안 예술가적 예민함과 완벽주의로 완성도 높은 창작을 펼쳐온 안무가로 일컬어진다. 『볼레로』 연작을 필두로 『시점』, 『선택』, 『몸의 협주곡』 같은 대표작을 가지고 있는데 2010년대 들어서는 타 분야와의 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대무용을 바탕으로 하여 가깝게는 발레, 한국무용, 힙합을 넘나들며 조금 떨어진 분야에서는 패션디자인, 컨템포러리서커스 등이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에서의 첫 테이프 역시 그 연결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혼합』은 2016년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프랑스 파리 국립사요극장에서 초연된 후 같은 해 가을 서울아트마켓(PAMS) 등을 통해 국내 무대에도 소개된 바 있다. 3월 24~26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재연된 『혼합』은 동서양과 고금, 춤과 음악의 어우러짐에 있어 한층 더 완성도를 높였다.

고전의 재창조
인트로(intro)는 춘앵무가 장식하였다. 김지연의 전통 춤사위는 궁중무 춘앵무의 의식성과 절제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뒤를 이어 춘앵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창조한 춤사위가 펼쳐진다. 네 명의 여성무용가인 이주희, 김지연, 김현, 김민지에 의해 춘앵무의 의식성과 절제미가 성공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그 속에서, 원형의 겉모습이 아닌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든 탐구력을 감지할 수 있다. 장삼을 흩날리고 흩뿌리는 원형은 손끝의 기술적인 움직임과 때때로 긴 소매로 변환되었다. 사방(四方) 즉 동서남북의 방향성은 무용가들의 춤 구도와 각도로 자연스럽게 대체되었다. 바닥에 깔리는 화문석은 바닥에 쏟아지는 사각의 조명 프레임으로 상징되며 무용가들이 만들어내는 사각의 대열로 그려지기도 한다.

춤 장르와 분야 간 융합
안성수 춤의 강점은 흡입력 높은 어우러짐이다. 한국무용의 순환적인 호흡과 발레의 우아한 선형 그리고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동작성을 한데 융해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현대무용을 주로 하면서도 발레나 심지어 한국무용과도 풍부하게 어울릴 수 있다. 실제로 안성수는 국립발레단의 의뢰로 『포이즌』을, 국립무용단의 의뢰로 『단』과 『토너먼트』를 안무한 바 있다.
안성수 춤의 강점은 『혼합』에서 거의 고점에 달한 것 같다. 궁중무의 하나인 춘앵무의 격식있고 정갈한 춤사위가 위에서 언급한 안성수 춤 속에 어우러져 있는데 일순 힙합을 연상시키는 동작들까지 위화감 없이 버무려져 있다. 춤 장르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애초에 하나의 춤인 마냥 흡입력 높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이는 음악, 조명, 의상 등 타 분야와의 상호작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궁중무악과 창, 클래식, 현대적 편곡 그리고 힙합이 융해된 음악은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태생부터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잔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세련된 감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조명이라든가, 평범한 듯하면서 전체적인 선이라든가 길게 늘어진 소매에 신경을 쓴 의상들 또한 한데 어우러져 진득한 융합을 실현한다.

예술가적 예민함과 완벽주의로의 회귀
2000년대에 안무적인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던 안성수는 2010년대 들어 장르나 분야 간 협업을 다채롭게 시도하였다. 작품 표현의 지평을 넓히는 데는 고무적이나 안무적 견고함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편, 다채로운 협업의 경험을 딛고 만든 이번 『혼합』에서는 안무의 밀도가 다시 되살아남을 읽을 수 있다. 안성수의 예술가적 예민함과 완벽주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인상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안성수의 또 다른 장점인 다양하게 변화하는 구도를 충분히 음미할 수 없었다는 점인데 이는 춘앵무의 의식성과 절제미를 지켜가려는 주제 의식 때문으로 여겨진다.

무용가들의 실행력과 이주희의 또 한 번의 성장
섬세하고 농후하게 실현되어야 할 안무는 5명의 남녀무용가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실현되었다. 특히 춘앵무의 원형을 추자마자 그것의 현대적인 재창조를 추어낸 김지연의 역량이라든가 잔잔한 흐름을 반전시킨 장경민의 남다른 개성이 돋보인다.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이주희가 이루어낸 또 한 번의 성장이다. 이미 20년 가까이 안성수의 뮤즈로서 본인의 이름 석 자를 확고히 새겨놓고 있긴 하나, 2010년대 들어와서 정체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주희의 가장 큰 과제는 음악에 대한 반응속도였다. 이주희가 음악을 완전히 숙지한 채 끌어가는 형상을 띠다보니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현저하게 빠른 동작 수행을 보였는데 이는 그녀를 지나치게 돋우러지게 하였다. 이번 『혼합』에서는 음악을 몸에 충분히 적신 채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작품의 흐름을 조율하고 밀도를 높이는 숨은 리더의 역할을 적절하게 해냈다.

『혼합』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안성수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후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이며, 작년에 초연되긴 했으나 수정·보완을 거쳐 완성도를 상당히 높였다는 점이고, 2010년대 들어 느슨해진 안성수 안무의 견고함이 되살아남을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고전의 재창조나 분야 간 융합에 있어 얼마만큼 집요하게 파고들어 작품화시켜야 하는지 하나의 예시처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