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이철진의 『승무』(3월 오픈런 대학로성균소극장)
원효가 계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이후부터는 속인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고 (曉旣失械生聰 已後易俗服) …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千村萬落 且歌且舞) - 「삼국유사」 義解 第五

#1
원효는 ‘자루없는 도끼’ 노래를 부르고는 요석궁에 사는 과부 공주와 연을 맺는데 성공한다. 태어난 아들은 설총. 그 이후 그는 파계승이 되어 떠돌며 춤추고 노래했다. 원효가 어떤 춤을 추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효, 설총, 일연의 고향은 경북 경산. 그곳에 뭔가 남아 있을까. 없다. 단지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원효라는 이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향언으로 새벽이라고 하였다.” 즉 원효는 새벽스님. 광대에게 얻어 깍아만든 박(무호舞壺라 부른다)을 두드리며 새벽부터 설렁설렁 춤을 추며 마을로 들어서면 동네아이들이 ‘새벽스님 춤춘다’며 같이 따라 췄을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스님의 춤추는 광경은 원효가 처음이겠다. 물론 지금 계승되고 있는 승무가 원효에서 이어졌다는 것은 어불성설. 지금 승무는 절에서 행사 때 쓰이던 춤과 의상에다 속가의 여러 춤이 모아져서 춤꾼과 관객들이 서로 오랜 세월 소통하며 만든 합작품일 것이다. 몇몇의 춤꾼이 아무도 몰라 주는데 힘겹게 계승해온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지지속에 그들의 박수 속에서 이어온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전통춤으로 보호받는 처지지만 승무는 수백 년 동안 크고작은 행사, 사당패천막, 장터 한켠에서 컨템포러리하게 맥을 이어 온 것이다. 보호따위를 받는 춤이 아니라 항상 동시대성을 지향하고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예전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승무』를 봤다.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 전혀 감흥이 없었다는 건 분명하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았다. 큰 동작만 보인다. ‘KBS 국악무대 보는 게 낫겠다’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현장감은 제로.
도대체 언제부터 눈앞에서 추던 춤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가서, 관객들과 주고받던 호흡은 모두 끊어지고 혼자 춤추기 시작한 걸까. 국립국악원 관람석에 앉으면 춤은 보이지 않는다. 무대만 보이고, 전통춤들이 계속 변화하며 무대화되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조금씩 알게 모르게 동작은 커지고 화장은 짙어지고 스테이지 사이즈와 공연스케줄에 따라 시간도, 그 뭣도 다 조절된다. 그걸 현대화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3.
대학로 소극장에서 승무 공연을 한다. 이제 막 오픈런을 시작했다. 대학로에서도 대박난 코메디물이나 가능한 오픈런을 한다니 … 알고 보니 10년째 이런 제목, 저런 제목으로 공연을 계속 이어 오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미친거 아닐까, 땅파서 춤추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2017년, 조그만 소극장에서 이철진이 ‘승무’ 오픈런을 선언한 춘삼월의 서울 춤판은 그지없이 화려한 것이었다. 안성수의 현대무용단은 특유의 세련미로 프랑스에서 호평받은데 이어 서울공연도 매진. 정작 본인은 말이 없는 분이었다는데, 말 많은 광팬들의 열혈지지를 받는 피나의 무대도 있고, 국립발레단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까지 소환한 것도 모자라, 안은미는 할머니들까지 무대에 불러모아 에너지를 발산한다. 대단하도다, 춘삼월 서울의 춤판이여.

#4
암전 후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 한 사람이 엎어져 있다. 이상하다. 가만히 돌아 앉아 기도 드리는 모양새가 아니다. 익숙한 승무는 얌전히 합장하고 기도하고 살포시 돌아서 장삼자락 날리는 그런 거였는데 이철진은 아니다. 그냥 엎어져 있다. 술 퍼마시고 쓰러진 듯, 아님 강남 뒷골목에서 퍽치기라도 당한 것처럼. 검은 장삼은 불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이제 꿈틀꿈틀 일어난다. 기시감이 든다. 뭘까. 며칠 지나 번득 든 생각은 카프카! 나는 왜 변신의 잠자를 여기에 붙여 연상 해내는 것일까. 번들거리는 검은 장삼을 메고 헤매도는 춤꾼의 모습과 검은 갑충으로 변한 잠자의 모습에 내 모습을 투영한 것일까.
이철진이 돌아서서 우뚝 서니 바위 같이 무거워 보인다. 한발 한발 딛는 것이 그렇게 무거워 보이기도 하고, 금방 자갈 굴러가는 듯 움직이기도 한다. 그렇게 무대를 누비고 장삼자락을 휘날리고 북을 치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절절이 풀어낸다.
연기가 보이는 배우는 하급. 기량이 우수하다 평가받는 피아니스트도 하급. 몸만 보이고, 테크닉만 보이는 춤꾼도 하급. 제대로 되면 장르 구분없이 그 너머가 보인다. 집중 할 수 있고, 빠져들 수 있다. 이철진의 춤은 그 너머가 보인다. A급. 성균소극장은 작은 공간. 무용수 호흡이 느껴지고 종아리의 긴장이 느껴진다. 승무가 그저그런 박제같은 옛날춤일거라 생각했던 나를 반성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편견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가.

#5
나탈리 포트만의 「재키(Jackie)」를 보며 처음 든 생각은 지겨움이다. 이거 뭐지. 기대한 게 아니네. 이 영화는 뭘 말하는 걸까. 중간쯤 가서 알았다. 이 영화는 미국 전통(American Traditional)을 얘기 한다는 것을. 미국의 역사와 전통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 재키는 말한다, ‘전통은 오랜 세월 동안 강인하게 살아 있는 것을 말해요’
‘승무’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강인하게 살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은 것이지 누가 지켜준 것이 아니다. 이철진의 ‘승무’ 역시 강인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이철진은 자기 춤을 추고 있고, 이철진의 승무는 컨템퍼러리하다. 새벽스님의 춤처럼.

#6
그날 관객은 세 명. 얼마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우중충하다.

#7
다시 삼국유사. 일연은 원효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시로 맺는다.

각승은 처음 삼매경의 축을 열었고,
무호는 마침내 온 거리의 풍습이 되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그림자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