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봄날 전국 방방곡곡 산과 들 어디든 노랗게 물들이는 꽃. 개나리를 떠올리는 분도 계시겠지만 오늘은 유채꽃입니다. 전국 어디든 피는 유채꽃이지만 유채꽃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제주이지요. 3월이면 이미 제주는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들고, 4월이면 유채꽃 축제로 인산인해를 이루겠지요. 제주의 봄은 누가 뭐래도 유채의 계절이지요. 모슬포에도 지금 유채가 한창이겠지요.

지난 봄 제주 가서 보고 온 노오란 유채꽃들은 모로 누워 일어날 줄 몰랐다 노오랗게 기절해 있었다 모슬포의 유채꽃들은 그랬다 모슬포의 바람 탓이었다 모슬포의 바람은 어찌나 빠른지 정갱이도 무릎도 발바닥도 없이 달려만 가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없어진 지가 사뭇 오래된 눈치였다 염치가 없었다 다만, 이따금씩이 아니라 연이어 귓쌈만 세차게 후려쳤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알 수가 없었다 송악산 민둥산엔 네 발굽 땅 속 깊게 묻은 채 떨고 섰는 오직 비루먹은 조랑말 한 마리, 그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연이어 귓쌈만 세차게 얻어맞고 있었다 秋史 선생의 대정마을로 내려와 보니 입 굳게 다문 채 제주 사람들은 그 바람의 모진 내력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 정진규, 「모슬포 바람」 전문

유채는 예로부터 파, 마늘, 부추, 달래, 생강 등과 함께 훈채()라 했습니다. 그 맛과 향이 맵고 자극적인 탓에 그리 불렀지요. 옛날 산사(山寺) 입구에는 으레 ‘불허훈주입산문(不許酒入山門)’이라는 금표(禁標)가 붙어 있었다고 하지요. 술과 훈채를 먹은 사람은 절에 들지 말라는 경고인데요, 술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고, 훈채를 먹으면 음욕이 생기고 화를 돋우게 되어 수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랍니다. 예전에는 절에서 훈채를 입에 대면 노역형에 처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고도 하네요. 하여튼 유채도 그런 훈채의 하나로 김치나 나물로 해서 즐겨 먹던 음식이었답니다. 꽃보다 음식이었다는.
제주에서는 유채가 또 다른 용도로 쓰였다고 합니다. 유채(油菜). 한자에서 드러나듯 유채를 풀면 ‘기름 나물’이라는 뜻인데요, 제주에서는 ‘지름 나물’이라고 해서 식용유가 나오기 전에는 유채 기름을 썼다고 합니다.
이렇듯 식용으로 기름으로 사용되었던 유채가 관상용 꽃, 유채꽃이 된 데는 신혼여행이 한몫을 했다지요.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금은 좀 덜한 편이지만, 예전에는 유채꽃이 그야말로 제주도 신혼여행을 상징하는 꽃이었습니다. 제주도 노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신랑신부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1980년대, 90년대 신혼사진은 으레 그런 모습이었더랬지요.
「동의보감」에 보면 “유채를 장복하면 양기가 너무 왕성하여 음욕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신혼부부가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는 데는 어쩌면 다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유채꽃은 영어로 ‘rape flower’라고 하는데 이게 또 참 거시기 합니다. ‘rape’가 강간(强姦)이란 뜻도 있으니, 그야말로 꽃 이름이 ‘강간 꽃’이라는 건데, 왜 강간이란 말을 꽃 이름으로 쓴 것인지 거시기 하지요. 동서고금 유채는 음욕을 일으키는 꽃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4월은 제주의 4월은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제주의 4월은 누군가에게는 핏빛 물든 4월이기도 합니다.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실런지요.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벌어진 제주도에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제주 민중들의 항쟁과 그에 대한 미군정기 때 군인과 경찰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국군), 서북청년단 등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 사건. 이 사건으로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하지요.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지요.
제가 제주 4·3 항쟁 사건을 처음 안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제주 살던 그 아이, 명자를 만난 게 그때였으니까요. 아니 정확하게는 명자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위 펜팔이라는 것을 통해, 편지를 통해 만났고 편지를 통해 그 아이의 마지막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어느 날 편지에 유채꽃 하나를 말려서 보내왔더랬습니다. 이 유채꽃이 한때 붉은 핏빛이었다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외삼촌들이 어떻게 죽어야 했는지, 엄마가 왜 미친년처럼 살아야 했는지, 핏빛 내력을 적어 보내왔더랬습니다. 세상을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때였습니다. 교과서 바깥을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때였습니다.
그 아이는 저보다 더 문학을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는 저보다 더 시를 사랑했습니다. 박용래와 이용악 같은 시인이 되고 싶다던, 카잔차키스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다던 그 아이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아비 없이 태어난 명자는 열여덟 살 꽃 같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간장을 먹고 절벽을 구르고 약도 먹고 별의별짓을 다했는데 죽지도 않더라 독한년, 독한년, 술에 취한 날이면 어미는 독한년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식구들 모두 빨갱이로 몰려 죽고 혼자 남은 어미가 어찌 살았는지 아니까 어미도 스스로 징한년이 되어 살아남은 것을 너무 잘 아니까 원망은 없다 했습니다

먼 남쪽 바다, 涯月의 석양이 왜 핏빛이 되었는지 알려주었던, 박용래와 이용악과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사랑했던, 애월의 모래밭에서 조르바와 춤을 추길 좋아했던, 마침내 애월에 몸을 던져버린 독한년, 열여덟 살 명자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먼 훗날 어느 가을 호젓한 오솔길을 홀로 걸을 때 혹여 코스모스 피었거든, 그 붉은 잎에 박용래의 코스모스 한 구절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주면 그것으로 좋겠다던, 독한년 명자, 삼십 년 전 명자가 문득 붉어지는 가을이 있습니다
- 박제영, 「애월, 독한년」 전문

시를 쓰다가 시가 도무지 되지 않을 때면, 문득 명자가 붉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4월이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유채꽃 같은 아이들이, 명자 같은 아이들이 세월호와 함께 팽목항 아래 깊이깊이 가라앉은 4월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끝
빚에 몰린 한 여자가 투신했다

마을 사람들 횃불을 들고 나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듬해 유채꽃이 피어서야
그 여자 이바지 떡짐을 이고 왔다

암, 쇠똥에 굴러도 이승이 백 번 낫지
마을 노인들 저마다 한 소식씩 던졌다

암, 그렇고말고 죽고 나서야 찍는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지!
- 송수권, 「땅끝에서」 전문

죽고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순리라지만, 스스로 목숨을 던지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은 결코 자연의 이치도 순리도 아니일 텐데. 그런 무리한 죽임과 억울한 죽음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가득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주도에 유채꽃은 피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은 유채꽃을 배경으로 또 사진을 찍겠지요. 그렇게 또 4월은 가겠지요. 봄날은 그렇게 가겠지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 전문

원고를 쓰다가 막혀서 며칠 묵히고 있었는데, 그래서 마감일을 조금 넘기고 말았는데 마침 오늘 세월호가 인양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팽목항에 가라앉은 노란 유채꽃들이 마침내 바다 위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