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어떤 식물의 씨앗은 특정 조건이 될 때까지는 흙 속에서 수천 년 잠들어 있다가 특정 조건이 되었을 때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싹을 틔우곤 하지요. 어린 왕자의 B612 소행성에도 바오밥나무의 씨앗이 잠들었다 어느 날 문득 싹을 틔우곤 하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씨앗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티고 견딜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잠들었다가 싹을 틔운 씨앗에 대한 몇몇 기록이 있지요. 그중에 유명한 것이 2천 년 만에 싹을 틔운 이스라엘의 대추야자 씨앗과 7백 년 만에 꽃을 피운 우리나라 함양의 연꽃 씨앗입니다.

2005년 이스라엘은 2천 년 전 대추야자의 씨앗을 싹틔우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씨앗은 원래 1963년에 발견되었는데, 발견자의 연구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40년 만에 싹을 틔운 것이라고 하지요. 2천 년 만에 싹을 틔운 이 대추야자는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969년을 살았다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에서 따온 것이지요. 이 대추야자가 싹을 틔워 열매를 맺으려면 대개 30년은 기다려야 한다니 아직 열매를 맺지는 못했겠네요.
함양의 아라홍련은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 발굴조사 중 출토된 고려시대 연꽃 씨를 함안 박물관에 3개, 농업기술센터에 5개를 나누어 심어서 이 가운데 3개가 싹이 튼 것인데, 현재 함양의 아라홍련 시배지(阿羅紅蓮 始培地)에 가면 팻말에 그 사연이 자세히 쓰려져 있습니다.

“전국 최고(最古) 최대(最大) 목간(木簡) 출토지로 잘 알려진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 사적 제67호) 내 연못에 대한 국립가야문화제연구소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옛 연씨가 수습되었다. 함안박물관에서는 수습된 연씨 중 일부를 인수받았으며, 이 중 두 알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하여 연대를 분석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 년 전, 즉 고려시대의 연씨임이 밝혀졌다. 이에 함안박물관에서는 농업기술센터와 공동으로 연씨에 대한 씨담그기(浸種)와 싹 틔우기(發芽)를 시도하였고, 이후 분갈이 등을 통해 2010년 7월 처음으로 ‘붉은 빛이 감도는 연꽃(紅蓮)’을 피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 연꽃을 ‘아라홍련(阿羅紅蓮)’이라 이름 지은 것은 함안이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과거 융성했던 아라가야의 옛 땅(古都)으로 기억되고 있었음에 착안한 것이다. 아라홍련은 한 해 중 7~8월에 피며, 하루 중 오전 6~11시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함양박물관에서는 아라홍련의 ‘고유종(固有種)’ 보호를 위해 이곳(가야읍 도향리 649번지)에 5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아라홍련 시배지’를 조성하였으며, 처음 핀 아라홍련의 씨뿌리(種根) 150촉을 2011년 5월 옮겨와 심었다. 아라홍련은 많은 관심과 노력 속에 시배지에 뿌리를 잘 내렸으며 해를 거듭할 수록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오랜 세월 잠들었다 깨어난 이 두 씨앗을 보면 묘하게 닮은 게 있습니다. 대추야자의 학명이 피닉스 다크틸리페라(Phoenix Dactylifera)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반복한다는 전설의 불사조(Phoenix)와 이름이 같지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불멸의 상징으로 파라오의 무덤에 대추야자 씨앗을 함께 묻었답니다. 연꽃은 또 어떤가요? 불교에서 연꽃은 부처가 앉은 자리요 환생과 윤회, 그리고 극락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불멸 혹은 부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두 식물의 상징이 묘하게도 닿아있지요.

오늘은 연꽃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인데 엉뚱한 얘기가 좀 길어졌네요. 본래 동양에서는 특히 중국에서는 불교 이전에는 연꽃이 군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군자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가 생긴 이래 연꽃은 군자의 상징보다는 불교적인 의미와 불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지요. 갠지스에 가면 종이 연등을 띄워 보내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라나시로 간다 갠지스가 흐른다는, 그랬다 시장을 끼고 돌다 어느새 길을 잃었다 싶으면 트랜지스터 회로와 같던 골목들은 스스로 강의 기슭에 닿았다 하늘에서, 땅에서, 물에서, 뼈를 드러낸 생들, 그들이 토해낸 배설물들, 주검까지도, 다만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어쩌면 태초에 저 반죽이 있었으리라 잿빛 연기 너머 시체 한 구가 던져지고, 연꽃이 뿌려지고, 어디서 날아들었을까 까마귀들이 카론인 양 물길을 내고 까악 까악, 이국의 표정을 좇아온 까만 얼굴의 아이가 꽃을 건넨다 1달러짜리 종이꽃이 떠가면서 붉어지는 강
- 박제영, 「갠지스」 전문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릴까요. 흔히 사월초파일 석가탄신일이면 전국의 사찰은 물론 거리 거리마다 연등이 걸리는데, 이때 연등을 한자로 어떻게 쓸까요?
요즘이야 한자 교육의 부재로 아예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한자를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답이 대개 둘로 나뉩니다. 연꽃 모양을 했으니 연등(蓮燈)이라고 쓰는 사람들과 연이어 걸린 등을 생각해서 연등(連燈)이라고 쓰는 사람들. 정답은 등에 불을 밝힌다는 뜻으로 연등(燃燈)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 가지 한자를 하나로 풀면 다 맞는 말이긴 하지요. 석가탄신일이면 연꽃 모양[蓮]의 등에 연이어[連] 불을 밝혀[燃] 부처님을 맞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포늪 가득 덮은 잎들 사이에 검초록 투구 같은 꽃봉오리가 무더기 무더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늪의 자궁이 한해 마지막으로 생산한 생명의 도화선인 갈색 줄기를 따라 지름 1.5미터 억센 잎을 찢어발긴 채 솟아 있다. 온몸에 돋은 가시로 제 살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터질 수 없는 선지빛 꽃의 뇌관. 그 고통과 상처의 시간이 창천마저 시퍼렇게 질리게 한다. 저와 같은 탄생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한 번이라도 가졌던가. 범람하던 분노와 증오. 탄식마저 사랑해야 할 여름의 끝, 빈손으로 돌아온 이들을 위해 불을 당기는 저 꽃 앞에서 나는 자꾸만 울고 싶은 것이다.

참혹하고도 황홀한 저 방화.
오늘도 가시연꽃이 핀다.
70만 평 우포늪 물도 끄지 못하는 내 마음 습지의 화염.
- 배한봉, 「가시연꽃」 전문

우리나라 어디든 가면, 연꽃을 볼 수가 있지요. 특히 주요 사찰에 가면 으레 연못에 핀 연꽃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런데 누군가 여태껏 봤던 연꽃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연꽃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대답할 겁니다. 우포늪에 가보셨냐고? 우포늪의 가시연꽃을 본 적이 있냐고? 아직 가보지 않았다면, 우선 배한봉 시인의 시, 「가시연꽃」을 읽어보시는 것이 좋겠지요. 물론 우포늪에 가본 사람이라도, 우포늪에 가서 실제로 가시연꽃을 본 사람이라도 읽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아직 가시연꽃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모르겠다면, 먼저 류인서 시인의 시, 「가시연꽃」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여름 늪지 가시연꽃은 새를 닮았다
봐라, 물의 꽃대 위에 꽁꽁 묶여있는 저것
가시 숭숭한 큰칼을 목에 쓴 사나운 새 한 마리 물 한가운데 갇혀있다
새는 부어오른 목을 바짝 하늘로 치켜든 채 고통스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내가 아직, 찢어져 꽃핀 저 소리의 갈래길을 헤아리고 있는 동안
검은 울대 위에 얹힌 새의 머리는 피묻은 가시관을 닮아간다
- 류인서, 「가시연꽃」 전문

그러나 연꽃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절절한 시편을 고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손택수 시인의 시, 「연꽃 에밀레」와 서안나 시인의 시, 「연꽃의 바깥을 읽다-월하정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두 편의 시를 읽어보시지요.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 손택수, 「연꽃 에밀레」 전문

당신은 모든 사랑의 질문이다

나는 입도 없이 고요하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긴 머리카락 풀고 미끄러운 물의 경전을 읽는다 내가 늙어가는 소리 들린다 당신을 떠올리고 지우는 건 마음의 오래된 치유의 기술 침묵은 비천한 사랑에도 향기를 돌게 하여 정인(情人)의 눈빛은 흐릿하고 향기롭다 비서(秘書)를 펼쳐 낡은 주술을 외운다 어둠으로 어둠을 뚫을 것이다

당신은 나의 왼뺨에서 오른 뺨으로 건너간다 나는 썩을 대로 썩은 진흙 손가락으로 당신의 빛나는 등을 어루만진다 천 개의 발로도 떠날 수 없는 첫 마음은 뿌리에 깃들어 왜 웅크려 있는지 당신에 대해 질문하면 물결 속에서 아스피린 냄새가 난다 나는 긴 머리카락을 풀어 비탄의 곡조로 흔들리고 흔들릴 것이다 꽃잎을 여는 건 연꽃의 바깥을 캄캄하게 읽는 일
- 서안나, 「연꽃의 바깥을 읽다-월하정인」 전문

이쯤 되면 이제 연꽃은 연(連)꽃을 넘고 연(蓮)꽃을 넘고 연(燃)꽃도 넘어 마침내 푸른 연(緣)꽃이 되고, 붉은 연(戀)꽃이 되었다 해도 되겠지요. 아니 연꽃은 그 모든 연들을 그 안에 담아 수백 년 수천 년 캄캄한 고요에 들기도 하고,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후에 부활하여 에밀레야 에밀레야 그 모든 연들을 부르듯 다시 꽃피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