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20대 중반에 풋내기 기자로 미술 동네에 입문한 게 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은 전설이 된 몇몇 미술인을 살아계실 때 뵌 일도 그 행운 중 하나다. 그 한 분이 화가 박고석(1917~2002)이다. 이름 고석(古石)에 겹쳐지는 바위 얼굴 같은 인상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고인과 젊은 시절 친교 했던 고은 시인은 박고석이 숙명의 눌변이었다며 “평양 목사였던 아버지가 준 본명 요셉을 버리고 낡은 돌이란 예명을 지은 그 마음을 안다”고 했다. 누군가 고석의 뜻을 물었더니 화가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옛 돌이 얼마나 멋지냐”고 되물었다 한다.
박고석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박고석과 산」(4월 25일~5월 23일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은 ‘박고석 표 풍경’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념전이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작품 40여 점이 나왔다. 산의 정기는 찐득찐득한 붓질 하나하나에 맺혀 용솟음친다. 뭉텅뭉텅 물감은 그의 핏줄처럼 울퉁불퉁하다. 그 물감이 어찌나 진했던지 막내아들 박기호(57)씨는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눌렀더니 껌처럼 눌어붙으며 내 지문이 그림에 남았다”고 했다. 푸른색을 지나 노랑과 분홍까지, 거침없는 색채의 향연은 말년으로 갈수록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백암산, 도봉산, 불암산, 무등산, 설악산 등 그는 산만 그리던 산사나이로 산에 미쳤던 화가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그의 산행 파트너로 박고석을 기록했던 강운구 사진가는 “그처럼 산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산이 되는 경지는 없다”고 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산을 스케치하려 손을 내달리는 속도가 무시무시해서 ‘쉭쉭’ 소리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4B연필이 너무 빨리 달아서 계속 깎아 올리며 스케치북을 넘겨드리는 조수 구실을 했다. 그가 찍은 사진 속에서 박고석은 이름 그대로 오래된 돌이 되어 산에 들러붙고 싶은 듯 산과 밀착돼 있다.
유화와 함께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건 스케치다. 본 그림을 위한 준비 작업 정도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완결성을 이룬 수작이 많다. 유족 측은 박고석이 생계를 위해 그렸던 수많은 잡지 삽화와 함께 이 스케치만을 따로 전시했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다. 전시와 함께 발간된 두툼한 도록에는 아들 기호 씨가 수년에 걸쳐 정리한 선친의 스케치가 유화와 나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박고석은 이중섭, 한묵 등 동료 화가들을 뒷바라지한 우정으로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전시장에 내걸린 자료 사진들 속에서 친구 화가들과 함께 한 그의 모습은 거인처럼 우뚝하다. 모습은 친견했으나 ‘거룩하게 술을 마셨다’는 화가의 술자리 말석에서 술 한 잔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